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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의 혁신 대신 비싼 값만 남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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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최지영 기자 중앙일보
최지영 산업팀 기자

최지영 산업팀 기자

미국에 사는 동생이 지난 9월 출시된 애플의 최신 폰 ‘아이폰 XR’을 최근 ‘원 플러스 원’으로 한 개 값에 두 개 샀다고 좋아했다. 정식 판매가 749달러(약 85만원)에 달하는 폰이다. 이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애플은 원래 아이폰 XR을 내년 2월까지 7000만 대 생산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난달 말 당초 생산 계획에서 30% 이상 수량을 줄였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아이폰 인기가 엄청난 일본에서도 아이폰XR 값이 2만5920엔(약 25만8000원)으로 ‘땡처리’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소식이 출시 한 달 만인 27일 전해졌다. 유감스럽게도 아직 한국은 가격 인하 소식이 없다.

아이폰XR은 애플 신제품 중 생산량이 가장 많은 보급형 제품이다. 하지만 저가형 제품에 주로 쓰이는 LCD(액정표시장치) 화면을 사용한 데다 후면 카메라 렌즈도 한 개뿐이어서 지난해 나온 아이폰8 시리즈와 별 차별성이 없다는 평가가 나왔다. 쓸데없이 비싼 새 폰 대신 아이폰8 재고를 사겠다는 고객이 늘고 있다.

아이폰XR은 물론 함께 나온 다른 신제품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역대 최대 화면 크기와 역대 최고가인 아이폰 XS맥스, 그리고 아이폰XS도 마찬가지다. 급기야 애플은 앞으론 아이폰 판매 실적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최근 밝혔다. 판매 전망이 암울해지자 애플 주가도 한 달 만에 216.3달러에서 174.62달러로 고꾸라졌다.

애플의 고가 정책은 이익이 급속히 쪼그라들고 있는 삼성전자 휴대전화 부문과 비교하면 성공적이라고 평가받아 왔다. 올 2분기 아이폰 글로벌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79만여 대 줄었지만 애플 매출이 299억 달러(약 33조4200억원)로 20% 늘어난 것도 고가 정책 덕분이었다.

하지만 가장 최근의 아이폰 신제품 고가 정책은 도를 넘은 것으로 보인다. 가장 비싼 아이폰XS맥스(512GB)가 196만원(국내 판매가 기준)이고, 아이폰XS(256GB)가 156만원, 가장 저가인 아이폰XR(256GB)도 118만원이나 하는데 쉽사리 지갑을 열 소비자가 얼마나 될까. 국내 이동통신업계에 따르면 아이폰 신제품 3종의 개통 대수는 전작의 60% 수준이다.

아이폰 인기가 시들하자 국내에선 이동통신 대리점들이 지금까지 애플에 당한 갑질을 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하겠다고 나섰다. 예전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혁신은 리더와 추종자를 구분하는 잣대”라고 말했다. 소비자의 마음이 떠난 브랜드는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리더에서 추종자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애플이 스스로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최지영 산업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