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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한궈위 신드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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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신경진 기자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가오슝(高雄)의 목표는 지갑을 두둑하게, 가오슝의 가치는 포용입니다”를 외친 정치인이 승리했다. 24일 대만 지방선거에서다.

고질적인 토박이·외지인 편 가르기, 대만 독립 논쟁, 흑색선전을 거부했다. “가오슝을 다시 위대하게”만 외쳤다. 국민당 후보 한궈위(韓國瑜·61)가 집권 민진당의 20년 텃밭에서 거둔 15만 표 차 승리는 인상적이다.

선거 전날 가오슝 마지막 유세장. 지지자 15만 명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손에는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와 가오슝 깃발이 들렸다. 민머리인 한궈위 지지 구호인 “대머리는 달을 따르고, 우리는 대머리를 따라간다”는 스티커로 치장한 군중이 민주주의 축제를 즐겼다.

안전 문제로 277만 가오슝 인구를 상징하는 민머리 의용대 277명의 동시 입장은 없었다. 전국에서 몰려든 의용대는 연단 앞에서 함께했을 뿐이다. 대신 15만 군중이 휴대전화 라이트를 켜고 “판좐(翻轉·뒤집자) 가오슝”을 목청껏 외쳤다. 한궈위는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고, 민심이 떠나면 천하를 잃는다”고 말했다. 같은 시간 총통 비서실장 측근인 천치마이(陳其邁) 민진당 후보 유세장에는 국기도, 시 깃발도 없이 녹색 민진당 깃발만 펄럭였다.

한궈위는 괴짜다. “유세차도, 후원회도 없이 생수 한 병으로 선거전”이라며 기층을 맨발로 훑었다. “사랑할 수 있는 대관람차를 만들겠다” “민머리는 머리카락 뽑힐까 두렵지 않다” 등 친서민 어록을 남겼다.

2017년 국민당 주석 선거에도 도전했다. “국방은 미국에, 과학기술은 일본에, 시장은 대륙에, 노력은 자신에 의지하자”는 20자 전술을 내놨지만 낙선했다. 한궈위는 2012년부터 5년간 맡았던 타이베이 농산물도매공사 사장 경력을 내세웠다. ‘야채상 CEO’를 자부하며 가오슝 마케팅을 약속했다.

한계도 많다. 정책 토론회에서 참패했듯 콘텐트가 약하다. “시장 선거지 공무원 선거가 아니다”라던 답변은 비루했다.

그래도 유권자는 한궈위를 선택했다. 소매를 걷어붙인 셔츠 차림으로 민심을 듣는 모습에 매료됐다. 중국 공산당 배후 논란을 이긴 힘이다.

선거 마지막 날 “당신은 나와 아이들의 영원한 영웅”이라던 부인의 페이스북 영상 유세도 주효했다. 낡은 정치에 지친 대만 유권자는 정치 대신 경제, 엘리트 대신 서민, 진보보다 전통을 선택했다.

국민투표에서는 명분보다 실리를 택했다. 올림픽 출전권을 지키고, 환경을 해치던 탈원전에 제동을 걸면서다. 대만 민주주의는 더 성숙했다. 시진핑과 차이잉원을 누른 유권자의 승리다. 총선을 앞둔 한국 정치권도 참고할 바다.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