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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신」정립 시급하다|이은윤<문화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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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경부고속도로 판 교 인터체인지 오른쪽 청계산 산록에「한국정신문화 연구원」이란 현판을 내건 10여 동의 현대식 한옥 건물 군이 있다. 주위 경관도 수려하고 건물들의 겉모양도 꽤나 당당하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우리의 5천년 역사를 관통하는 한국정신이란 게 곧 손에 잡힐 듯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한국정신 문화연구원이 설립 10년을 훨씬 넘은 오늘날까지 한국정신이라는 것을 한마디로 이거다 하고 요약, 정리해 제시한 일이 없다.
또 정부수립 40주년, 무슨 대학교 개교 80주년 등의 화려한 행사들이 그 동안 수없이 많았지만 어느 국가기관·학술단체에서도「한국정신」의 정립을 모색하거나 이를 위한 연구기금 설치를 서둔 예가 없다.
참으로 답답하고 딱한 일이다. 한때는 위정 당국자들이 정신문화의 진흥을 제2의 경제개발이라고 외쳐 댔고, 일제 식민지라는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나 해방을 맞고 난 후로는 일제에 의한「역사의 단절」을 통한하는 한 많은 학계·정계의 발언들이 홍수를 이뤘었다.
아직도 이 같은 한풀이 발언들은 3·1절, 광복절 등의 대회장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 같은 단절의 극복을 위한 최우선 과제는「한국정신」의 부활이요 계승일수 밖에 없다.
8·15해방 이후 수많은 역사·민속·한국철학자와 민족종교 지도자들이 나왔고 멀리 구미 각국에서까지「한국학」이라는 새로운 학문분야가 등장, 한국연구 박사들을 배출하고 있다. 이 적지 않은 한국학연구 박사들 가운데서도 누구 하나「한국정신」을 명확히 밝혀 낸 일이 없다.
물론 정신이란 걸 자동차나 냉장고처럼 가시적인 형상으로 제시할 순 없다. 그래도 역사나 문화 깨나 가졌다는 민족과 국가 치고 나름의「민족정신」이라는 것을 갖고 있지 않은 예는 거의 없다.
흔히들 오늘의 미국을 떠받치고 있는 3대 미국정신으로 개척정신·실용주의·청교도주의를 든다. 거대한 중국문화를 형성해 온 중국정신으론 중화사상이 있고, 영국에는 기사도라는 나름의 국민정신이 있다.
우리보다 역사가 잔륜한 일본의 경우도 하다못해「무사도」라는 게 있다. 걸핏하면 공·사간에 유구한 5천년 역사와 고유문화전통을 자랑하는 우리의 민족정신은 과연 무엇인가.
50년대 후반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나왔던「은근과 끈기」를 고유의 한국정신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조선조 때 풍미했던「선비정신」이나 신라시대의「화랑도」를 내세워야 할지 당혹스럽기만 하다.
요사이「선비정신」이란 게 심심지 않게 등장하면서 아직은 아주 소폭이지만 적지 않은 공감대를 넓혀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지만 그게 바로「한국정신」이라는 국민적 동의가 형성된 것도 아니다. 더욱이「선비정신」은 일제의 왜곡된 한국사관에 의해 상처투성이의 매도를 당했고 지금까지도 봉건·사대적인 측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있어 한국정신으로 선뜻 동의하는데 주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렇듯 한국정신 문화연구원이란 문교부 산하의 엄연한 국가기관이 설립돼 있기까지 한 현실 속에서도「한국정신」 은 도대체 손에 집히질 않는 채 오리무중이니 답답한 지경을 넘어 울화가 치민다.
몇 해 전 한국 정신문화 연구원 파견 근무하는 교수 한 분과 점심을 함께 한 일이 있다.
식사중 주로 민족종교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눈 끝에 대체 정신문화원은 그 간판이기도 한「한국정신」을 무엇으로 정해 놓고 있느냐고 넌지시 물어 보았다.
그는 아주 당혹스런 표정으로 의외의 질문이라는 듯이『글쎄 한국정신이라면 무엇을 내세울 수 있겠느냐』고 반문해 왔다.
평소 별다른 흉허물이 없이 지내는 터라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토론(?)을 시작했다.
아니 간판을 내걸었으면 간판 값을 해야지 하다못해 개에게도 족보라는 게 있어 자기 정체성을 밝히는 문명시대에 항 차 거대한 국가기관의 간판이 자신의 정체성조차 이거다 하고 내놓을 수 없다면 무슨 망신스러운 일이냐고 열을 올렸다.
대화의 결론은「한국정신」은 갑자기 창조될 수 없는 골동 적인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전제아래 가까운 역사부터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밖에 없다는데 이르렀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제시된 게「선비정신」이었다.
조선조 역사가 일제에 의해 봉건착취의 부정적인 역사로 가르쳤던 점을 반성, 그래도 그 5백년이란 긴 시간을 버티어 준 보이지 않는 긍정적인「기둥」을 찾아야 하는데 조선조를 이끈 기본정신으론「선비정신」을 단연 손꼽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선비정신을 오늘의 한국정신으로 계승하는데는 먼저 선비정신의 어두운 측면들은 제거되고 그 밝은 측면들이 보완, 전승돼야 할 것이다.
선비정신은 계급의식·나태·공론 등의 부정적 측면을 갖기도 하지만 청렴·강직·지조 등 전통적 가치와 함께 오늘의 한국이 갈구하는 장점도 많다.
정신문화원 교수와의 대화는 잠시의 공허한 시도에 불과했다.
이제 북한을 포함한 한민족은 자신의 역사적·문화적「정체성」을 밝히는「한국정신」의 정립을 하루속히 서둘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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