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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명화 절도 그 은밀한 세계를 훔쳐내 전시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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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절도범이 낸 상처
1971년 브뤼셀의 팔레 데 보자르 미술관에서 도난당한 베르메르의 유화 ‘연애편지’. 범인은 동파키스탄 난민과 빈민 구제를 요구했다. 작품은 되찾았지만 도난 과정에서 찢기는 등 크게 손상을 입었다.

도둑맞은 베르메르
구치키 유리코 지음,장민주 옮김, 눌와,320쪽, 1만3000원

"미술품 절도는 무기와 마약밀수에 이어 제 3의 국제범죄로 성장했다. 배후에 대규모 범죄조직이 연루된 경우도 드물지 않다. 1990년대 들어 연간 피해액이 10억 달러를 넘었고 액수는 매년 10% 비율로 증가하고 있다. 도난당한 미술품이 원래 주인에게 돌아갈 확률은 약 10%. 일단 도둑맞으면 대부분 돌아오지 않는다."(24쪽)

미술 관련서 하면 화가의 불우한(또는 남다른) 일생, 화려한 여성 편력, 그 속에서 꽃핀 천재성, 혹은 작품 창작에 얽힌 뒷 이야기 등에 익숙하던 이들에게 '도둑맞은 베르메르'는 색다른 메뉴다. 책은 미술품 절도의 원인, 도난당한 작품의 처분, 도난 사건의 수사, 도난보험 문제 등 '미술품 도난에 대해 (당신이) 알고 싶은 모든 것'을 상세하게 다룬다. 피해액 규모(추정액 2억~3억 달러)에서 근세기 사상 최대 절도 사건으로 기록된 90년 미국 보스턴의 가드너 미술관 사례를 중심으로 시시콜콜하다 싶으리만큼 '그림 도둑'이라는 소재를 집요하게 파고 들어간다.

열거되는 사건의 수가 적지 않다 보니 다소 끈기와 집중력을 요한다. 허나 마음의 준비만 돼있다면 신문기사를 읽는 듯한 현장감 있는 서술과 폭넓은 자료 조사를 거친 만만치 않은 정보량 등 즐길 만한 부분이 적지 않다. 이 책처럼 미술 세계의 또다른 분야를 주목한 책으로 두 거물급 화상이 피카소를 스타로 만든 과정을 통해 미술 거래의 본질을 짚은 '피카소 만들기'(다빈치, 2002), 일류 경매회사 소더비가 밀수 미술품 거래에 어떻게 깊숙히 발을 담그고 있나를 파헤친 '소더비'(청림출판, 1997)등이 나와 있다.'도둑맞은 베르메르'의 저자 구치키 유리코가 고바야시 요리코와 함께 쓴 '베르메르, 매혹의 비밀을 풀다'(돌베개, 2005)에도 베르메르 작품의 위작 소동이 포함돼 있어 눈여겨볼 만하다.

가드너 미술관 도난사건의 핵심에는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얀 베르메르(1632~75)가 있었다.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로 잘 알려진 그는 과작으로 인해 '수수께끼의 화가'로 불린다. 50여 점의 작품을 그렸지만 현재 남은 것은 30여 점에 불과하다. 이중 1971년 '연애편지'와 74년 '기타를 치는 여인''편지를 쓰는 여인과 하녀'가 줄줄이 도난당했다. '편지를 쓰는 여인과 하녀'는 도난 일주일 만에 되찾았다가 86년 다시 도둑맞았다. 90년에는 가드너 미술관에 걸려 있던 '세 사람의 연주회'가 사라졌다.

베르메르 작품은 도둑의 손을 많이 탄 편에 속한다. 게다가 발생한 도난 사건 다섯 건 중 세 건은 IRA(아일랜드공화군)같은 정치단체와 연루되기도 했다. 74년 런던 켄우드하우스에서 '기타를 치는 여인'이 사라진 뒤 두 명의 남자가 서로 자신이 범인임을 주장하며 영국 정부에 협박을 가했다. 한 남자는 식량 50만 달러어치를 서인도제도 그라나다로 보내지 않으면 그림을 찢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다른 남자는 북아일랜드 출신 폭파범 자매를 석방하면 그림을 돌려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단순히 돈으로 맞바꾸기 위해 그림을 훔치는 수준에서 한 단계 진화(!)한 양상을 보여준 것이다.

지은이는 이같이 명화를 인질 삼아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시도를 '아트 테러리즘'이라고 부른다. 20세기형 신종 범죄인 셈이다. 또 이를 위해 그림을 훔쳐가는 것을 인질 납치(키드내핑)에 빗대어 '아트내핑'이라고 이름짓는다. 그런가 하면 잘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경매를 여러 번 거쳐 작품의 출처를 위장하는 '그림세탁'도 등장했다. 책은 왜 하필 베르메르인가? 라는 물음을 던져가면서 오늘날 미술품 절도가 갖는 다양한 측면을 이리 저리 들여다본다.

책에 따르면 가령 누가, 왜 훔치는지는 파악하기 쉽지 않다. 한때는 특정 작품을 지명해 절도를 의뢰한 뒤 비싼 값에 사서 자기만 볼 수 있는 곳에 소유하는 '악덕 컬렉터'설이 힘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가 확인된 적은 별로 없다. 도난당한 작품은 암시장에서 거래되지만 그 가격은 원래 가격의 10% 가량에 머물게 된다. 이밖에 지은이가 하고 싶은 말은 독자의 감상 후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성 싶다. "현대 미술품 절도는 결코 귀족적이지도, 멋있지도 않다"(137쪽). '도둑맞은 베르메르'는 화려하게 채색된 명화들의 두꺼운 물감 속에 숨겨진 여러 겹 속살 중 하나를 시원하게 들춰보여준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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