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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술가게 뜨고, 심야택시 줄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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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요즘은 일이 끝나면 친구들끼리 모여서 와인이나 맥주를 딱 한 잔씩 하고 일찍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빅데이터로 본 주52시간제 신풍속 #회식 줄어 주점 결제금액 10% 뚝 #와인 1잔 3000원 잔술가게 생겨나 #집밥 대세에 반찬 소비 77% 증가 #미술관·체육관행 택시 승객 늘어

5년 차 직장인 김인수(31)씨 얘기다. 김씨는 지난 7월부터 ‘주 52시간제’가 시행되면서 직장 내 회식 문화가 거의 사라졌다고 말한다. 어쩌다 술자리를 갖게 되더라도 친한 사람들끼리 ‘딱 한 잔’씩만 마신다고 한다.

이런 ‘잔술 문화’는 주 52시간제 시행 이후 정착된 대표적인 소비 트렌드다. 신한카드 마켓센싱셀에 따르면 한 잔에 3000원 내외를 받고 와인을 내주는 잔술 가게들이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다. 마켓센싱셀은 고객의 결제데이터 등을 분석해 새로운 소비 트렌드를 연구하는 부서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회식의 감소와 잔술 문화의 정착에 따라 주점에서의 결제 금액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신한카드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7~9월) 주류업종에서 평균 545억원을 사용한 신한카드 고객들은 올해 3분기 평균 495억원을 사용하는 데 그쳤다.

주 52시간제로 인한 소비 트렌드 변화가 포착된 곳은 주류업종뿐이 아니다. 집밥을 찾는 사람이 늘면서 반찬 시장도 커지고 있다. 배민 프레쉬·마켓컬리·헬로네이처 등 주요 온라인 반찬 배달 서비스 가맹점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올해 10월 신한카드 고객이 반찬 가게에서 소비한 금액은 지난해 10월보다 77.4%나 늘어났다. 신한카드는 상호에 ‘반찬’이 들어간 가맹점, 주요 온라인 반찬 배달 서비스 가맹점 등을 대상으로 통계 자료를 뽑아냈다. 김효정 신한카드 빅데이터사업본부장은 “주 52시간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주류업종에서의 결제 금액이 적어지고 반찬 시장이 커지고 있다는 건 ‘저녁 있는 삶’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며 “숫자로만 이뤄진 데이터 속에서도 이런 트렌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 52시간제는 택시 승차 시간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카카오택시를 운영하는 카카오모빌리티가 종로구 종로1·2·3·4가동, 서초구 서초2동, 영등포구 여의동,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 등 대기업 밀집지역의 택시 호출 시간을 분석한 결과 ‘정시 퇴근’이 늘어나고 ‘심야 퇴근’이 줄어드는 경향이 포착됐다.

심야시간(오후 11시부터 12시까지) 택시 호출 점유율은 전년 대비 크게 내려갔지만 퇴근시간(오후 6시부터 오후 7시까지) 택시 호출 점유율은 크게 오른 것으로 집계됐다. 서초2동의 경우 심야시간 점유율은 20.4%에서 15.9%로 4.5%포인트 하락했지만, 퇴근시간 점유율은 4.1%에서 5.8%로 1.7%포인트 높아졌다.

여가 활동도 늘어난 것으로 분석됐다. 지난 7~8월 중 카카오택시 호출 목적지를 분석한 결과 미술관행 승객이 지난해 동기보다 234%나 늘어났다. 영화관(118%), 박물관(101%),  전시관(167%), 체육관(138%), 헬스클럽(159%), 테니스장(159%) 등으로 향하는 승객들도 많이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주 52시간제가 시행되기 전인 지난 1분기(1~3월) 영화 및 공연에 185억원, 여가 및 놀이에 426억원, 운동(헬스)에 282억원을 소비했던 신한카드 고객들도 지난 3분기(7~9월)엔 각각 227억원, 454억원, 299억원으로 소비액을 늘렸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퇴근을 제때 못 하고 회사에 묶여있다가 회식에 끌려가기까지 ‘직장에 매인 삶’을 살던 회사원들이 이제야 일과 생활의 균형을 조금씩 찾아가게 된 것 같다”며 “주 52시간제가 중소기업으로까지 확대되면 이런 변화가 우리 사회 전체로 퍼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용환 기자 jeong.yonghwa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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