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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기획·탐사기사] 1. 최우수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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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본지가 주최한 '제2회 대학생 기획.탐사 보도 공모전'의 수상작을 오늘부터 3회에 걸쳐 연재한다.

그러나 수상자들이 여름 내내 현장을 발로 뛰면서 구슬땀을 흘려 만든 작품을 지면 사정 때문에 다 싣지 못하게 됐다. 수상자들과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수상 작품들은 필자들과의 협의를 거쳐 요약문을 싣는다.(전문은 아래 No Cut 참조) 더불어 김민환 심사위원장(고려대 교수)의 심사평과 수상자들의 소감을 소개한다. [편집자]

'세계적인 과학자 아인슈타인.퀴리.뉴튼이 한국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수학만 잘하는 아인슈타인은 대학을 못 가고 평범한 회사에 취직한다. 퀴리는 대학까지 마쳤으나 여성 이공계 인력을 받아주는 데가 없어 유학을 준비한다. 뉴튼은 박사과정을 밟던 중 열악한 환경에 좌절하고 의과대학에 편입한다.'

오랫동안 전해오는, 한국의 과학계를 풍자한 이야기다. 그러나 웃을 수만은 없다. 우리나라에서 아주 머리가 좋다는 과학고 출신의 '과학영재'들이 실제 겪고 있는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1983년 경기과학고를 시작으로 설립된 과학고는 현재 전국에서 17개가 운영되고 있다. 과학고가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반 '특목고 열풍'의 주역으로 부상하면서부터다. 당시 입학했던 과학영재들은 벌써 20대 후반이 되었다. 그러나 과학영재들은 이미 과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있다.

◇과학영재들의 현주소=지난 8월 한달간 26~30세의 과학고 출신 1백1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는 한국 과학영재들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과학고의 설립목적인 '과학영재 육성'에 걸맞는 길을 현재 걷고 있느냐"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 1백11명 중 39%(43명)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들은 주로 평범한 회사원이 됐거나, 대학에 진학할 때 의대.경영대 등 다른 분야를 선택했다. 반면 이공계 석.박사 과정에 있거나, 연구원의 신분으로 '과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는 응답은 26%(29명)에 불과했다.

A과학고와 서울대 재료공학부를 졸업한 최모(27)씨는 현재 인천의 한 제강업체에서 생산설비와 현장직원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는 "병역특례 혜택을 받고자 어쩔 수 없이 생산현장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경북 의대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김모(27)씨는 93년 B과학고에 입학했던 과학영재였다. 과학고 2학년 때 자퇴한 그는 "(과학고는) 과학영재를 위한 학교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입시에 휘둘린 영재교육=과학영재들도 '학벌주의'와 '입시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94년도 입시에서 서울과학고가 서울대 응시자 1백32명 전원합격이라는 '기록'을 세우자 다른 과학고들도 서울대 합격자 수를 늘리기 위해 입시교육을 더욱 강화하고 나섰다.

"과학영재들도 '명문대 간판'이 중시되는 사회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었죠. 우선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니 과학고생들도 입시에 매달렸던 것이죠."

과학고 출신인 엄모(28.환경컨설팅업체 대리)씨의 말이다. 과학고 출신인 정모(27.독일 KIST-유럽 연구소)씨는 "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과학고가 일종의 '대입 합숙학원'으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대학에 진학한 이후도 문제였다. 과학고.서울대를 졸업한 이모(27.미 스탠퍼드대 유학 예정)씨는 "과학고를 나온 우수한 인재들이 서울대에서 '평범한 대학생'으로 전락했다"며 "이들은 서울대의 '쉬운' 1.2학년 수업에 적응하지 못해 술.게임.당구 등 다른 '유혹'에 빠져 공부를 등한시했다"고 말했다.

◇미비한 국가적 지원=이번 설문조사에서 40.5%(45명)가 "과학인력 양성을 위한 국가의 정책적 지원이 전혀 없었다"고 대답했다.

과학고와 연계된 교육기관으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손꼽힌다. 하지만 KAIST의 한 학년 정원은 6백명. 반면 전국 17개 과학고에서 매년 배출되는 과학영재는 1천1백여명. 일반고교에서 KAIST에 진학하는 학생들도 많은 만큼 과반수의 과학고 졸업생들은 일반대에 진학해야 한다.

게다가 과학고생들은 일반 고교생들보다 불리한 내신성적을 감수하고 입시를 치러야 한다.

이공계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과학고생들에게 내신 혜택을 주던 '특목고 비교내신제'가 논란 끝에 97년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번 설문조사에서 국내 대학 연구소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들의 수입이 연간 5백만~1천여만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포항공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신모(26)씨는 "생계를 위해 과외를 해야 하는 현실도 힘겹지만 앞으로 전망은 더욱 회의적이다. 이러니 누가 힘든 과학자의 길을 택하겠느냐"고 말했다.

◇중3때 적성 잘 판단해야=중3 때 자신의 적성을 냉철히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많은 과학고 출신들은 어린 나이에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볼 수 있다.

과학고 출신자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서', '우수한 학생들과 겨뤄보고 싶어서' 등 적성과 상관없이 과학고를 택했던 이들도 전체 응답자의 40%(44명)나 됐다.

"공부를 잘 하는 애들은 너도나도 과학고를 지망했습니다." 과학고 진학에 실패했던 김모(27)씨의 말이다. 일반고교 문과를 거쳐 현재 고려대 경영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김씨는 "지금 내 적성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과학고에서) 떨어진 게 다행"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인문대 미학과에 재학 중인 박모(26)씨는 뒤늦게 전공을 옮긴 경우. 박씨는 과학고 출신으로 당초 서울대 산업공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공연예술에 관심이 많던 그에게 공대 수업은 재미가 없었다. 박씨는 "뒤늦게라도 내 길을 가고 싶어 전공을 바꿨다"고 말했다.

과학고 출신의 유모(27.화학연구소 근무)씨는 "중학교에서 특수목적고 진학에 대한 진로교육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며 "국가에서도 미래의 과학자를 엄격히 선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설문조사에서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서' 과학고에 진학했다고 응답한 18명 중 '과학영재 육성'에 걸맞는 길을 가고 있다고 대답한 이는 단지 1명(6%)뿐이다. 애초에 적성과 능력을 엄격히 심사해 '예비 과학자'를 가려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제도 개선 방향=정부는 2001년에 '과학영재학교 제도'를 새로 도입했다. 이에 따라 과학영재학교로 지정된 부산과학고는 KAIST.포항공대와 무시험 특별전형 협약을 맺어 학생들이 과학영재 교육만 받고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또한 3단계의 엄정한 절차를 거쳐 전국의 중학생 중 1백44명의 '예비 과학자'를 엄선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교육부 관계자는 "(영재학교 지정의) 확대에 대해서는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부산과학고의 운영 결과를 찬찬히 더 살펴보고 결정할 문제"라고 밝혔다.

최모(28.서울대 박사과정)씨는 "다른 과학고도 영재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과학고 영재교육의 이수 여부를 대학 입시에 반영하거나 대학 학점으로 인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라고 말했다.

과학고 출신의 정모(26.서울대 공대)씨는 "과학영재 육성을 위해 (기초과학 위주의) 과학대도 설립해야 한다"며 "아울러 이공계 문제를 위한 특단의 조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려대 신방과 함영철·이동박·박소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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