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64㎞ 반도체 행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백면서생 공학도 107명이 무박 2일간 64㎞를 걸었다. 당시 삼성반도체통신의 64K D램 기술개발팀이었다. 행군하며 메모리 자체 개발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였다. 반도체 기술 자립을 꿈꾸던 1983년의 일이었다. 그때는 그럴 만도 했다. 메모리 개발 계획을 발표하자 “차라리 철공소에 초음속 항공기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게 낫다”는 소리가 회사 내부에서 나왔다고 한다. 경영진은 분위기를 일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군사문화가 사회 전반에 배어 있어 민간 기업에서도 행군이 낯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뒤, 당시 행군을 두고 “늦게 시작해 256K D램부터 개발하게 됐으면 어쩔 뻔했나”는 우스개가 퍼졌다.

기술을 배우러 미국 마이크론에 가서 무심코 공장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몰래 기술을 훔치려 했다”는 의혹을 사는 바람에 쫓겨나는 수모도 겪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83년 11월 자체 기술로 만든 64K D램이 탄생했다. 그 뒤 삼성반도체통신을 합병한 삼성전자는 사업 측면에서 승승장구했다. ‘보르도 TV’를 탄생시킨 가전과 ‘애니콜 신화’를 쓴 모바일 분야도 약진했지만, 성장의 밑바탕은 뭐니뭐니해도 반도체였다. 2004년 순이익 10조원을 기록하자 요미우리신문은 “삼성의 이익이 소니·도시바 등 일본 10대 전자회사의 이익을 합친 것보다 2배 많다”고 보도했다. 지난해에는 인텔을 제치고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이 됐다. 올해 3분기에만 17조57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외국 기관이 조사하는 ‘존경받는 기업’ ‘일하고 싶은 기업’에서도 늘 손가락에 꼽힌다.

삼성전자를 그렇게 만든 반도체 사업 관련 행사가 어제 열렸다. 회사 창립 49주년 및 삼성반도체통신 합병 30주년 기념식이다.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한국 산업 전반을 둘러보면 마음이 그리 밝지 않다. 나라 경제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고, ‘미래의 삼성전자’ 또한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흔들리면 한국 경제가 휘청거릴 수 있다는 얘기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쓴 미국 MIT 다론 아제모을루 교수 등 석학들이 “한국에는 삼성전자 같은 기업이 몇 개 더 필요하다”고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그런데 왜 제2, 제3의 삼성전자는 보이지 않는 걸까. 무엇보다 기업인들의 분발이 필요하다. 하지만 과연 분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 의문이다. 기업을 키울수록 권력으로부터의 압박이 늘고, 북한에 가서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는 소리까지 듣는 마당이기에 하는 말이다.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