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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서 광장으로봾북방외교 전환-당정 교섭창구 일원화의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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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부와 민정당은 9일 오후 당정정책조정회의를 갖고 남북교류특별법을 제정키로 하고 남북문제를 다루는 정부 내 창구도 일원화하는 등 새로운 남북시대에 발맞춰 법적·제도적 몸단장을 새롭게 했다.
회의에선 남북교류와 협력에 관한 법을 놓고 법무부·통일원·상공부 등이 제각기 만든「특별법」「기본법」「특례법」등을「특별법」으로 명칭을 통일하고 통일원이 마무리 성안작업을 맡되, 법무부 안을 골간으로 하기로 했다.
또 지금까지 북방정책협의조정위원회 (위원장 안기부장)·대외협력위원회 (위원장 부총리)·북방경제정책실무위원회 (위원장 기획원차관)·국제민간경제협의회·안보장관회의·전략기획단 (단장 통일원차관) 등 북방 및 대북관계기구가 많아 중구난방 식이던 것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대북한 및 북방교류·협력 조정위원회 (가칭) 가 총괄하고 대북교류는 통일원이, 대북방 교류는 외무부가 주관토록 조정하는 등 체계화 작업을 마쳤다.
그러나 이날 회의에서 합의한 기구조정과 관계법률정비 등은 외형적인 작업에 불과하고 그보다는 그동안 정부가 추진해온 대북「외교」에 대한 방식·방법과 진행속도를 재조정했다는 데 더 중요한 의미가 내포돼있는 것으로 보인다.
회의는 강영근 국무총리·박준규 대표위원의 인사말에 이어 정주영 씨의 북방활동보고, 행정부와 당측의 보고·토의 순으로 진행됐는데 전반적으로 지금까지의 대북「외교」가 밀실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며 특히 정 씨의 방북은 정 씨 개인차원의 교섭이 큰 몫을 차지했다는 등의 해명에 역점이 주어진 인상이며 기타 최근의 남북관계 진척에 대한 우려·비판이 주종을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6공화국 들어 대북·북방정책은 박철산 대통령정책보좌관의 단독플레이에 거의 의존돼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헝가리와의 수교를 비롯한 대 동구권개방정책 수립과 접촉이 그렇고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도 박 보좌관 단독으로 은밀히 이뤄져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항간엔 그가 북쪽을 여러 차례 왕래했다는 소문이 기정사실처럼 파다하게 퍼지기도 했다.
이제 와서 1인에 의한「밀실외교」가 아니었다고 부인하지만 적어도 외부에선 모두가 그렇게 알고있으며 정부 내 각종 대북기구·대 북방정책 관계 부처들은 그같은 방식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고 비판을 가해왔었다.
특히 안기부·외무부·통일원 등 주무부서는 항상 뒤통수를 맞는 격이 되곤 하다 보니『국가존립과 관계된 중요정책을 공식채널에 의해 제도적으로 다루지않고 어떻게 뒷전에서 한두명의 머리로 해치울 수 있느냐』고 공공연히 불평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날 회의는 그러한 내부불만에 대한 해명과 함께 대북·북방관계기구를「협조위」로 통합, 채널을 공식화함으로써 형식상으로나마 밀실외교방식을 탈피,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했다는 점이 사실상의 핵심내용이라고 분석되는 것이다.
이는 다시 현정권의 북방외교방식의 수정이며 기본노선의 차질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현정권이 현재까지의 방식을 변경할 수밖에 없는 요인으로는 △위에서 설명한 주무부서간 마찰 이외에도 △권력내부의 불협화 △개방정책이 급속도로 추진되는데 따른 보수세력의 반발과 제동 △미국측의 견제 등이 꼽히고있다.
이런저런 벽에 부닥치면서 한때 박 보좌관 퇴진설까지 나돌았으나 이날 회의로 일단 한발 후퇴하는 선에서 수습된 것으로 보인다.
1인 밀실외교가 외형적으로나마 제도의 틀 속에 들어간 것이다.
이날 회의에선 정 씨의 방북사실 자체에서부터 그간의 남북관계정책 전반에 대한 비판도 거세게 제기된 것으로 알려져 여권 내 보수의 층이 상당히 두텁게 자리잡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강 총리·조순 부총리 등과 박 민정당대표를 비롯한 당측 인사들이 특히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고 한다.
북측은 국회회담 예비접촉을 일방중단한데서도 잘 나타나 있지만 기본적으론 대남 적화통일전략을 전혀 바꾸지않고 있는데 우리 쪽만 들떠 공연히 앞서 나가고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정 씨 개인은 초청하면서 정부차원의 접측은 팀스피리트 훈련을 이유로 회피하는 것은 우리정부의 지위를 격하시키고 스스로 와해되도록 하는 의도적인 내부교란책이란 경계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아울러 정 씨가 북측과 교환해온 의정서 추인문제도 추인을 거부하면 정부가 통일을 불원하는 것이 되고 추인을 하면 민간주도형식에 정부가 뒤따라가는 꼴이 돼 이래저래「정부격하」와 연결되는 함정이란 분석이 제기되면서 신중히 결정키로 결론지었다.
이러한 대목도 정주영 씨와 한 조를 이뤄 금강산개발 합의를 이뤄낸 박 보좌관에 대한 간접비판이자 박 보좌관으로 상징되는 6공화국의 북방외교정책에 대한 내부비판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따라서 앞으로 그 진행속도에도 상당한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이번 대북정책 채널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한미관계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고 북방정책도 그같은 서방외교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것을 발판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의견을 모은 것은「부시」방한 등을 앞둔 시기적인 면도 고려되긴 했지만 미국측의 강한 입김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대북·북방정책이 기본노선에서부터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우선 박 보좌관이「협조위」에 관계부 장관과 함께 한 멤버로 들어가있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 트여있다.
그에 대한 노 대통령의 신임이 매우 두텁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간에 쌓아온 박 보좌관 개인채널을 계속 활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의 역할은 계속되리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민정당 당직자회의에서『대북정책을 청와대 몇몇 참모가 밀실에서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다는 시각이 있는 모양이나 그렇지 않다』고 박 보좌관을 두둔한데서도 노 대통령의 그에 대한 신임도를 엿볼 수 있다.
그 동안의 실적, 그에 따른 국민적 분위기 등으로도 큰 기조의 변동은 없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어쨌든 이날 회의는 6공의 북방정책추진의 1단계 제동을 뜻하는 것으로 앞으로 개방과 교류 등의 진행속도 등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고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칠지는 두고 볼일이다. <허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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