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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금 먼저 발뺐다 … 버팀목 없는 코스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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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연일 곤두박질치고 있는 한국 증시가 버팀목마저 잃어버렸다. 연기금은 먼저 발을 빼고 있고,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코스피 지수는 사흘째 연중 최저치를 경신했다.

수익률 방어 위해 국내 주식 매도 #2008, 2011년 위기 땐 소방수 역할 #코스피, 사흘째 연중 최저치 경신 #정부는 “기초체력 견고” 반복만

25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연기금은 이달 1일부터 이날까지 코스피와 코스닥 시장에서 1673억원어치의 주식을 팔았다(순매도). 같은 기간 4조2733억원대의 국내 주식을 팔아치운 외국인과 비슷한 행보를 보인 것이다. 특히 주가 하락이 본격화했던 지난주부터는 매도 행진에 가속도가 붙었다. 코스피 시장에서 지난 15일부터 이날까지 9거래일 중 연기금이 순매수를 기록한 건 지난 19일 단 하루였다. 나머지 8거래일 동안에는 끊임없이 팔아치우기만 했다.

두 시장에서 이달 1일부터 이날까지 개인투자자가 2조6225억원을 순매수했고, 연기금을 포함한 기관투자가 전체가 1조4347억원을 순매수했다는 사실과는 뚜렷하게 대비된다. 연기금은 위탁받은 공공의 자금을 운용하는 곳을 말한다. 국민연금이 대표적이다. 공무원연금·군인연금·사학연금 같은 연금공단과 행정공제회·교직원공제회 같은 공제회도 연기금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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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금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나 2011년 유럽 재정위기 등 증시 위기 상황에서 증시를 떠받쳤던 버팀목이었다. 연기금은 당시 외국인과 개인이 쏟아내는 대량 매물을 받아내면서 공포를 희석하고 증시의 바닥을 다져나가는 안전판 역할을 톡톡히 했다. 2008년에는 9조7763억원, 2011년에는 13조4958억원을 순매수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침몰하는 증시를 지키기는커녕 누구보다도 먼저 ‘구명보트’에 오른 모양새다. 일차적인 이유는 국내 증시보다 연기금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 더 큰 문제라는 데 있다. 국민연금을 포함한 주요 연기금은 현재 저조한 수익률로 뭇매를 맞고 있다. 올 7월 현재 국민연금의 전체 운용 수익률은 1%대에 불과하다. 특히 국내 주식 운용 수익률은 -6.11%로 추락했다. 수익률 방어를 위해선 하락하고 있는 국내 증시 탈출이 우선인 상황이다.

추세적인 이유도 있다. 연기금들은 변동성이 높고 ‘좁은 시장’인 국내 증시 대신 부동산 등 대체투자와 해외 투자 비중을 늘려나가고 있다. 기금 적립금 643조원의 국내 최대 연기금인 국민연금은 지난 5월 ‘중기자산배분안’을 통해 올 7월 기준 19.1%인 국내 주식투자 비율을 내년부터 2023년까지 15% 안팎으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주요 연기금 중 유일하게 두 자릿수 운용 수익률(10.9%)을 기록했던 지방행정공제회의 한경호 이사장도 지난 24일 기자간담회에서 “지난해 18%였던 총자산 대비 국내 주식 비중을 올해 9월 14%까지 낮췄다. 이 비율을 내년엔 더 낮출 계획”이라고 말했다. 연기금이 증시 버팀목 역할을 했던 과거에는 기금 적립금이 늘어나면서 투자처 확보 차원에서 국내 주식을 사들였던 상황이고, 지금은 국내 비중을 줄이면서 국내 주식을 내다 파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한국경제·기업 기초체력 약화 … 작은 충격에도 쉽게 휘둘려”

유승민 삼성증권 투자전략팀장은 “국민연금 등 연기금은 이미 국내 주식 비중이 충분히 채워져 있는 상황이라 분산투자 측면에서 국내 주식 비중을 줄일 수밖에 없다. 연기금에 자금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국내 주식투자 비중을 더 늘릴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증시가 정부를 의지하기도 어렵다. 정부와 금융·통화 당국 등은 “한국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은 견고하다”는 입장만 되풀이하며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최근 증시 급락이 ▶미·중 무역분쟁 ▶미국 금리 인상 등 주요국 통화정책 정상화 ▶신흥국 불안 등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영향 때문이라는 점도 묘수를 내놓기 어려운 이유다. 익명을 원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컨틴전시 플랜(비상대응책)을 점검하고, 외국인의 자금 유출입 동향을 모니터링하는 것 외에는 사실상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이종우(전 IBK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이코노미스트는 “정부 입장에서 보면 속수무책이고 백약이 무효인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정부로서는 증시 개입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남길남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장은 “과거에는 증시 안정자금을 통한 주식 매입이나 공매도 금지 등의 대책을 통해 정부가 시장에 개입했지만 부작용이 컸다. 정부가 나서서 주가지수 하락을 막는다는 건 더는 적절치 않은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박기현 유안타증권 리서치센터장은 “11월 미·중 정상회담이나 미국의 추가 기준금리 인상 여부 등에 따라 시황이 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라 정부가 섣불리 개입해서는 안 된다. 또 마땅히 내놓을 대책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 증시가 한국 경제 및 기업의 기초체력 약화로 외부의 크고 작은 충격에 쉽게 휘둘리는 측면이 있는 만큼 이를 개선할 중장기적 대책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 경제가 급속히 가라앉고 있고, 국내 기업의 수익성이 악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대외 악재와 맞물려 증시에 반영된 것”이라며 “정부는 한국 경제와 거시경제 상황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현숙·김태윤·정용환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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