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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그 놈 숨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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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경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경희 정치팀 기자

김경희 정치팀 기자

2009년 4월 5일 오전 2시 30분, 우리 집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는데 창문이 덜컹거렸다. 누군가 창밖의 모기장을 뜯고는 손으로 창문을 열었다. 창문 틈새로 모자에 마스크를 쓴 A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웠다. 공포에 질려 소리쳤지만 A는 도망치지 않고 계속 내 모습을 지켜봤다. 두려움은 수치스러움으로 변했고, 점점 화가 났다. 옷을 추려 입고 쫓아 나가니 그제야 담을 넘어 도망쳤다.

분이 풀리질 않았다. 1년 전부터 집요하게 우리 집 창문을 맴돌면서 옷 갈아입는 걸 훔쳐보거나, 자위행위를 하곤 달아나던 놈이다. 내가 혼자 있을 때나 엄마와 있을 때만 찾아오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누군지는 곧 알게 됐다. 이미 동네에서 소문이 흉흉한 이웃집 남자였다. 한번은 옷에 물을 끼얹었는데 몇 시간 후 그 집 빨랫줄에 그 옷이 걸려있었다.

집 주변에 CCTV가 없었고, A는 당연히 범행을 부인했다. 경찰에 여러 차례 신고도 해봤지만 과태료 몇만 원 물리는 것 외에 딱히 방법이 없다고 했다. A는 점점 대담해졌고, 급기야 화장실 창문을 열어젖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내가 꼭 무슨 일을 당해야만 A를 처벌할 수 있다는 건가 싶어 답답하고 화가 났다. 그날 밤 경찰서에 가서 밤새워 눈물로 진술서를 썼고, 드디어 그가 입건됐다. 하지만 성범죄가 아니라 주거침입죄였다. 법원 증인 출석까지 성실히 임했지만, 100만원 벌금형 수준으로 끝이 났다.

이 악몽이 다시 떠오른 건 며칠 전 뉴스 때문이다. 한 남성이 벌거벗은 채로 혼자 사는 여성의 집 문을 두드리고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여성이 겁에 질려 소리치고 경찰에 신고했는데, 처벌은 과태료 5만원 부과였다. 알고 보니 옆집 남자인 B는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했다.

B의 엽기 행각이 복도 CCTV에 고스란히 찍혔지만, 경찰은 “피해자가 그 사람이 벌거벗은 걸 본 것도 아니니 피해가 없다”고 했다. 여성은 정신적 피해를 보았고, 두려움에 이사를 택하는 등 물질적 피해도 발생했다. 하지만 현행법으론 B의 잘못이 5만원 어치에 불과하다.

성범죄의 영역에서 경범죄와 중범죄는 한 끗 차이일 수 있다. A의 성도착증이 심화됐다면 말 그대로 내가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B가 단순히 술버릇이고 고의성이 없다고 주장하려면, 옆집에 여자 혼자 산다는 것조차 몰랐다는 걸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현행법은 “마치 내가 심각한 일을 당해야만 상대방을 처벌할 수 있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김경희 정치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