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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 있으면 ‘적장’도 모셨던 DJ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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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일본지사장

서승욱 일본지사장

20년이 지났지만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1998년 3월25일 여의도 국회 앞 한나라당 당사 3층 기자실. 김영삼(YS) 정부에서 총리와 신한국당(자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 대표를 지낸 이홍구 당시 ‘주미대사 내정자’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취임한 지 딱 한 달 된 당시 김대중 대통령(DJ)이 그를 주미대사에 내정했다.

“총리를 지낸 야당의 전 대표가 대사직을 맡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란 이 내정자 본인의 말 그대로였다. 그가 당대 최고의 미국 전문가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됐던 야당의 간판 정치가였다. 그런 그가 주미대사에 발탁돼 대선 패배 이후 초상집으로 바뀐 친정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으니 분위기는 썰렁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엔 DJ의 인사를 ‘야당 파괴 전략’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당내엔 존재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치부 막내 기자였던 필자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진행된 회견 내용을 수첩에 받아 적었다. 어색함 속에서도 이 내정자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IMF 위기 직후) 우리가 처한 오늘의 상황 역시 이 나라가 겪어보지 못한 특수한 위기임에 틀림없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나라가 필요로 한다면 최선을 다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 결심했다”….

20년 전의 장면을 다시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 파격이 점점 신선하게 와 닿는다.

당대 최고의 전문가라면 야당의 리더도 발탁했던 대통령의 결단, 자신을 냉대하는 친정일지라도 일부러 그곳을 찾아 담담하게 소신을 밝히는 내정자의 모습을 지금의 현실에선 찾을 수 없기 때문일까.

초년병 기자 시절의 묵은 기억까지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건 DJ와 대비되는 현 정부의 외교관 인사다.

자신들은 ‘조직 혁신’ ‘편중 인사 타파’라고 말하지만 “실력 있는 북핵·북미통들은 적폐로 찍혀 나간다” “노무현 정권과 인연이 깊거나 특정 학교, 특정 인맥 출신들만 잘나간다”는 뒷말이 끝이 없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운명이 걸렸다는 역사의 분기점에서, 치가 떨리게 살벌한 국익 사수의 현장을 리드하는 외교 지휘부의 맨파워엔 의문부호만 따라붙고 있다.

최근 발표된 외교부 인사 이후엔 신중하기로 유명한 일본 외무성의 관료들조차도 “도대체 한국 정부 외교관 인선의 기준이 뭐냐”고 물어온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전교 1등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1등이 되는 현실이 너무나 신기하다는 표정들이다.

실력이 있다면 누구에게라도 문을 열었던 20년 전 DJ의 인사도 지금 기준으로는 ‘촛불정신 위반’일까.

서승욱 일본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