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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을 갖고 싶을 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05호 31면

김봉석의 B급 서재

장미의 이름

장미의 이름

최근 사고 싶은 책이 생겼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오래전 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가지고 있던 책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누군가를 빌려주었거나 했겠지. 그런데 약 2년 전부터는 가급적 종이책을 사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서재에 이중 삼중으로 책이 쌓이면서 도저히 통제 불능이라, 두어번 책을 내보냈다. 지인의 만화방에 장르소설을 거의 다 기증했고, 만화책도 모두 팔았다. 그러고도 서재 정리는 요원했고, 다시 쌓이는 책들로 지금도 포기 중이다. 하여 지금 당장 읽거나 자료로 필요한 책이 아니면 사지 않는다, 가급적 e북으로 산다는 원칙을 만들었다. 언젠가는 읽을 거야, 언젠가는 필요할 거야, 라는 생각으로 사들인 책들 덕분에 서재는 마굴이 되었다. 들어가면 헤어날 수 없는 곳. 정리하자는 생각으로 들어갔다가 손에 잡힌 책 뒤적이느라 하루를 날리는 곳.

그런데 『장미의 이름』은 굳이 종이책으로 사고 싶어졌다. 새로 나온 판본의 장정을 보니 너무나 가지고 싶어져서. 다시 산다고 해도 아마 다시 읽지는 않을 것이다. 펼쳐서 몇 군데를 읽어보다가 놓겠지. 그리고 눈에 잘 띌만한 장소에, 책을 꽂아두게 될 것이다. 가끔 지나치다 눈에 보이게. 그리고 가끔 들춰보게.

당장 필요한 책만 산다는 원칙은 비교적 잘 지키고 있다. 어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일본에 가서, 한국에 절대 안 나올 것 같은 이를테면 마니악한 서브컬처에 관련된 책이나 도판이 잘 실린 책이나 인터넷에 안 올라갈 만한 책이라고 생각하면 산다. 한국을 나갈 때는 예외로 친다.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그런데 한국에서도, 책을 안 사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어떤 주제를 집대성하거나 도판이 잘 들어간 책은 사게 된다. 어릴 때는 집마다 백과사전이 있었다. 많게는 20권이 넘는 전집류. 틈틈이 아무 권이나 빼서 아무 쪽이나 펼쳐 읽었다. 순서도 필요 없고,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다. 편하게 잡다한 지식을 읽고 지나치는 기분은 독서의 즐거움 자체였다. 지금도 그런 책들은 자주 산다. 『범죄의 해부학』이나 『어리석음에 대한 백과사전』이나 『궁극의 리스트』 등등.

그리고 견물생심. 내용이 좋기도 하지만, 장정이 훌륭하거나 박스 등이 특색 있어 사고 싶은 책들이 있다. 한정판이라 해도 평범하면 동하지 않는다.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은 단편을 담은 책인데 각 권마다 나눠진다. 제본도 독특하여 옛날 책을 보는 느낌도 있다. 그런 책을 보면 어쩐지 흐뭇한 생각이 든다. 필요해서 산다기보다, 소장하면 좋을 것 같아서 산다. 마음의 위안이기는 한데, 실제로 그 책들을 읽고 있을 때도 기분이 좋아진다.

종이책의 위대함, 본질적인 우월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 하나는 편리성이다. 불편하면, 힘들면 좋아도 멀리하게 된다. 책도 마찬가지다. 교양이니, 학문이니 해도 그걸 원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책도 중요하고 발전시켜야 하지만 대중적인 확산을 원한다면 중심은 편리함으로 간다. 웹으로, 스마트폰으로 책, 텍스트를 읽는 추세는 바뀔 수 없다. LP가 다시 영향력을 갖고, 판매량이 늘어나고 있지만 스트리밍 음원 서비스를 능가할 수는 없다. LP를 아끼고 소장하는 사람들의 층이 늘어나고 확고해지는 것만으로도 문화는 풍요롭게 변해간다.

책도 다르지 않다. 점점 e북이나 텍스트 자체로서 소설이나 교양 등을 접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그러면서도 결코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소설이나 에세이나 인문서나 읽고 반하면 손에 만지고 눈에 들어오는 물질로서 소장하고 싶어진다. 기왕이면 더 멋진 장정의 판본으로 가지고 싶다. 물성을 원한다. 나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lotusid@naver.com
대중문화평론가. 부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등. 영화·만화 등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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