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2. 가족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열여섯 나이에 시집와 30명이 넘는 대가족 뒷바라지를 한 어머니 차순녀(右)와 아버지 이동숙(左).

전북 군산 초입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차머리를 돌려 처음 만나는 소담한 마을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 행정구역 상으론 전라북도 옥구군(현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안터. 드넓은 대야평야를 앞에 하고 뒤로는 문중 산인 건장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요즘도 십여가구가 모두 전주 이씨인 집성촌이다.

아버지 이동숙은 전주 이씨 익안대군(이성계의 셋째 아들)파 18대 손이었다. 익안대군파 3대 손께서 역적으로 몰려 몸을 피한 곳이 바로 안터라고 했다.

조실부모한 할아버지 이상제는 곤궁한 살림이었지만 한학에 조예가 깊은 분이셨다. 동학에 깊숙이 관여하셨고 경문 외우는 일로 아침을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하셨다. 지금도 늦은 밤 의관을 정제하고 경문을 외우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할아버지가 거처하는 사랑방엔 늘 열댓 분의 어르신들이 드나들었다. 심각한 얘기가 오갈 때면 깊은 한숨과 역한 담배 연기가 사랑방을 짓눌렀다. 일본 순사들의 눈초리가 매섭던 시절이었다.

집안 살림은 할머니 김흥아의 몫이었다. 근검하고 부지런하셨다. "집에서 십리 안에서는 내 자손들이 남의 땅을 밟지 않게 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을 정도로 억척스러웠다. 당신은 밀기울 죽을 먹으면서 일하는 머슴들에겐 고봉밥을 담아주셨다고 한다. 덕분에 근동 논밭 대부분을 소유할 정도로 살림이 불어났다.

할아버지가 '김 선생'(독립운동가로 추정)이란 분과 10여 일씩 집을 비우거나, 일본 순사들이 하나 뿐인 시백부를 쫓을 때는 안절부절하며 할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어머니 차순녀는 전북 부안 하장리 사람이다. 16세 때 네 살 어린 아버지 이동숙과 결혼해 30명이 넘는 대가족을 뒷바라지하며 청춘을 보냈다. 할머니도 무서웠지만 어머니 역시 녹록지 않은 분으로 기억된다.

위로 오빠가 넷이 있었던 어머니는 친정 부모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긴 했지만 당시 관행대로 신교육의 기회는 주어지질 않았다.

처녀 시절 집에서 가까운 궁월리 교회에 야학이 들어섰다고 한다. 배움에 목 말랐던 어머니는 부모 몰래 공부를 시작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들통났다. 야학을 마치고 한밤중에 사립문을 들어서다 외할아버지에 발각돼 치도곤 혼줄이 나곤 했다. 하지만 그녀의 고집은 꺾이질 않았다.

"아버지, 그냥 지 공부하게 해주시요. 야학 선생님이 그러는디, 여자들도 남자들 맹키로 밖에서 일하는 세상이 온다고 글드만요. 나쁜 짓 안 허고 공부만 열심히 헐께요."

이렇게 부모님을 설득한 어머니는 기어이 언문을 깨쳤고, 공부하는 오빠들 먼발치에서 '동몽선습'과 '소학'을 뗐다고 한다.

어머니의 시련은 혼인하고부터 시작됐다. 아들을 간절히 원하는 시어머니 밑에서 언니와 나, 오로지 딸 둘 만을 낳으셨으니 당시 사회 분위기로 그 분의 신산스런 삶이야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을까.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