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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서다 인내심 한계 …입장 포기한 신트라 페나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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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2)

한량으로 태어나 28년을 기업인으로 지냈다. 여행가, 여행작가로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는 여행자다. 길에서 직접 건져 올린 이야기, 색다른 시각으로 비틀어 본 여행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여정을 따라 함께 걸으며 때로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 생생한 도보 여행의 경험을 나누며 세상을 깊이 여행하는 길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편집자>

신트라 궁전이 내려다 보이는 신트라의 언덕. [사진 박재희]

신트라 궁전이 내려다 보이는 신트라의 언덕. [사진 박재희]

땅끝마을로 정했다. 포르투갈에 있다는 유라시아의 땅끝마을 카보 다 호카(Cabo da Roca)는 이베리아 반도가 대서양을 만나는 꼭짓점, 최서단으로 기록되어있다. 리스본에서 출발해서 포르투갈을 관통해 걷는 여행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호카 곶(카보 다 호카)으로 간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지나 스페인의 땅끝마을 피스테라(Fisterra)까지 걷는 매우 불필요하고 무모한 800km 걷기 여행의 시작이다. 비행기를 타면 영화 하나를 채 못 볼 만큼 빨리 닿을 거리이고 기차나 자동차로도 몇 시간이면 닿을 길을 난 걷기로 했다. 왜냐고 묻지 마시라. 할 일 없는 여자가 시간이 너무 많아서 그런다고 일갈해도 좋고 아니면 한번 된통 고생을 해봐야 정신을 차리겠지. 정도로 생각하셔도 좋다.

하여튼 난 두 다리로 직접 걷고 느끼는 방식으로 느리고 천천히 여행할 작정이다. 순례길을 기준으로 걷고 의미 있는 지점, 가령 성모가 그것도 20세기에 직접 목동들 앞에 나타났다는 파티마나 포르투갈 문화의 중심지 코임브라, 브라가, 포르투와 기미랑이스를 둘러볼 예정이다. 시작과 끝이 땅끝이라니 뭔가 그럴듯하게 의미가 와 닿았다.

처음, 마지막 이런 말은 어찌나 매력적인지 공연한 의미일 뿐이라 해도 나는 그 상징성에 저항하기가 힘들다. 호카 곶의 기념비에는 16세기 포르투갈 시인, 루이스 데 카몽이스의 시구가 적혀 있다고 했다. “여기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대서양과 닿은 육지의 최초이자 땅의 끝에서 이번 여행을 시작한다.

신트라 궁전이 있는 도심.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록된 신트라의 곳곳을 돌아 볼 수 있는 중심지이다. [사진 박재희]

신트라 궁전이 있는 도심.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록된 신트라의 곳곳을 돌아 볼 수 있는 중심지이다. [사진 박재희]

호카 곶은 리스본에서 북서쪽으로 30km쯤 떨어진 신트라(Sintra)에 있다. 신트라는 알록달록 자유로운 상상력의 극치인 페나성과 무어인의 성, 비밀의 정원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내가 신트라에 끌린 더 큰 이유는 신트라의 고원 지대가 역사 이전부터 신성화된 달의 숭배지였다는 점이다. 서양에서 달은 여신, 마술을 상징한다.

이베리아인 컬트 예배의 중심지, 태양이 아니라 달을 숭배한 사람들이 ‘달의 산’ 꼭대기에 세운 마법의 도시라니…. 신비한 산골짝의 자연과 함께 절대 지나치지 않을 곳으로 꼽아뒀었다.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정해진 신트라를 일컬어 일찍이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신에게 은총을 받은 에덴동산’이라고도 했다. 세상에 에덴동산을 리스본에서 기차로 갈 수 있다니! 호시오역에서 아침 일찍 에덴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신트라 역. 관광객이 가득차서 역사를 빠져나가는 데도 시간이 오래걸렸다. [사진 박재희]

신트라 역. 관광객이 가득차서 역사를 빠져나가는 데도 시간이 오래걸렸다. [사진 박재희]

과연 태어나 처음 본 광경이 신트라역에서 시작되었다. 신비나 마법, 그런 얘기가 아니다. 포르투갈의 신비한 도시여야 할 신트라 역사는 마치 축구경기장에서 수만 명이 한꺼번에 지하철을 타려고 몰려나온 것처럼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으로 가득했다. 그건 그날 맞닥뜨릴 인파의 예고편이었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 여름 성수기도 아니고 휴일도 아닌 9월의 평일에 포르투갈의 작은 마을에서 파도처럼 밀리는 사람들 속에 있게 될 줄이야. 한국 사람은 7월 8월만 피하면 될 줄 알겠지만 6월과 9월은 유럽에서 여행 좀 한다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때이다.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할 텐데 괜찮겠어요?” 페나성 입장권을 달라는 내게 매표소 직원은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티켓을 판매하는 직업인의 양심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설마’라는 몹쓸 병에 걸려 14유로나 하는 티켓을 샀고 결국 사용하지 못했다. 성에 들어가려고 줄을 선 사람이 성 전체를 감싸고 세라 산 중턱까지 이어졌다.

어디가 입구인지 확인해보지 않았다면 난 그날 멍청하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이미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 하루를 다 보냈을지도 모른다. 유럽 사람들은 인내심의 한계를 맞은 표정으로 줄을 서 있었고 굳이 인내심을 테스트할 생각이 없는 나는 무모하게 시험에 드는 대신 산꼭대기 알타크루즈에 오른 후 정원과 성채만 돌아보기로 했다.

산에 있는 성을 바다의 신이 지킨다는 발상이 신선하다. 페나성을 지키는 인어 신상. 성문 위에 앉아 있다. [사진 박재희]

산에 있는 성을 바다의 신이 지킨다는 발상이 신선하다. 페나성을 지키는 인어 신상. 성문 위에 앉아 있다. [사진 박재희]

성문에는 어디서도 보지 못한 기괴한 신상이 앉아 있었다. 하체는 물고기인데 흔히 본 인어상과 다르다. 두 마리의 물고기로 다리 모양을 하고 앉은 인간의 상반신과 얼굴은 파격이다. 인어는 보통 아리따운 여성이었건만 쭈글거리는 배를 가진 노인이고 소름이 오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성적 괴인이다. 이런 인어는 상상하지 못했다. 산꼭대기의 성을 조개껍데기 파도 위에 앉은 바다의 신이 지킨다니!

알록달록 화려한 컬러의 페나성은 안내판으로만 보면서 상상해야 했다. [사진 박재희]

알록달록 화려한 컬러의 페나성은 안내판으로만 보면서 상상해야 했다. [사진 박재희]

830km 해안선을 지닌 포르투갈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울 수도 있을 이런 파격에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성을 지키는 인어 신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을 사랑해서 목소리를 대가로 사람의 다리를 얻고, 걸을 때마다 칼에 베이는 아픔을 느껴야 했던 인어 공주, 사랑 때문에 결국 거품이 되어버린 동화 속 인어가 성문을 지키면 어디 불안해 잠이나 자겠나! 엄숙하고 근엄한 성과는 달리 알록달록 컬러에 인어 신상에 이르기까지 페나성은 편견을 깨부순다.

무어인의 성채. 뺏고 빼앗긴 역사가 가득하다. [사진 박재희]

무어인의 성채. 뺏고 빼앗긴 역사가 가득하다. [사진 박재희]

신트라에는 페나성과 신트라 왕궁 말고도 숲속에 있는 그림 같은 여름 별장들, 비밀의 장치가 가득 찬 정원이 있다. 빼앗고 뺏긴 격동의 역사가 흔적으로 남아 있는 무어인의 성곽은 신트라에서 다리품을 팔고 시간을 많이 소비해도 좋을 곳이다.

신트라의 골목길에서는 길을 잃어봐도 좋겠다. 아름다운 언덕에서 미로처럼 연결된 산길. [사진 박재희]

신트라의 골목길에서는 길을 잃어봐도 좋겠다. 아름다운 언덕에서 미로처럼 연결된 산길. [사진 박재희]

아줄레주(Azulejo) 장식의 정수를 보여주는 궁전보다 더 매력적인 곳이라면 당연히 산골을 걷는 것이다. 신트라에는 유혹적인 오솔길이 많다. 시간 속으로 사라진 이들이 걷던 길을 따라 성곽을 오르고 작은 마을 길도 방향 없이 걸어 왕가와 귀족이 여름을 보낸 곳을 헤매어봐도 좋다. 신트라는 무자비할 만큼 수많은 관광 인파의 공격을 꿋꿋이 견디고 다행히도 아직 낭만과 신비를 잃지 않았다.

호카 곶의 십자가 기념비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이 줄을 서 있다. [사진 박재희]

호카 곶의 십자가 기념비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이 줄을 서 있다. [사진 박재희]

신트라의 절정은 호카 곶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바램은 어긋났다. 호카 곶에는 땅끝의 정취가 없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 없이 광활해 자리를 뜰 수 없을 만큼 신비하고 호젓했던 땅끝마을 피스테라와는 달랐다. 관광객을 위한 십자가 기념비와 어여쁘게 세워진 등대가 땅끝을 찾은 사람을 위해 사진 배경이 되어줄 뿐 그야말로 사진을 찍으려 몰려드는 관광지였다.

호카 곶에서 기념품으로 가장 인기 있는 최서단 땅끝 마을 방문 기념증. 가격 12유로. [사진 박재희]

호카 곶에서 기념품으로 가장 인기 있는 최서단 땅끝 마을 방문 기념증. 가격 12유로. [사진 박재희]

여행사 버스가 사람을 풀어놓는 호카 곶은 실망스러웠다. 내 여행의 시작을 이런 기분으로 해야 한다니 슬그머니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때로 감흥은 스스로 만들어야 하니까, 평범한 일상이라도 괄호를 치고 이름을 붙이면 특별한 날이 되니까 난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선 사람들 사이에서 사진을 찍었다. 내 이름과 방문 날짜를 적어주는 땅끝 방문 증명서까지 샀다. 과학적 방식으로 측량된 땅끝이 분명하다는데 그래도 감흥이 살지 않았다.

호카곶의 십자가 기념비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이 줄을 서 있다. [사진 박재희]

호카곶의 십자가 기념비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이 줄을 서 있다. [사진 박재희]

“우리 사진 좀 찍어 줄래요?” 결혼 50주년 기념으로 온 노부부의 사진을 찍어주고 나서 퍼뜩 정신이 들었다. 비교하는 마음엔 기쁨과 만족이 없다는 것. 잊고 있던 절대 법칙이다. 편견 없이 그대로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본질이자 여행자가 받는 축복이자 특권이 아닌가. 대체 왜 호카 곶에 와서 피스테라가 아니라고 실망을 한단 말인가. 호카 곶은 피스테라가 아니다.

호카 곶의 등대가 유라시아 최서단을 지킨다. [사진 박재희]

호카 곶의 등대가 유라시아 최서단을 지킨다. [사진 박재희]

고요하고 호젓한 분위기일 거라 짐작하고 기대한 탓에 호카 곶이 관광객이 들끓는 번잡한 곳으로만 남을 뻔했다. 비로소 특별한 날을 기념하려고 호카 곶을 찾은 많은 사람의 설렘이 보였다. 사람들이 각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찾는 곳, 유라시아의 최서단에서 나도 출발을 기념했다. 이제 포르투갈을 가로질러 걷는다.

박재희 모모인컴퍼니 대표·『산티아고 40일간의 위로』저자 jaeheecal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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