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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에선 다른 민족도 고려인처럼 한국말을 썼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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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부산에서 만난 송 라브렌티 감독. [송봉근 기자]

부산에서 만난 송 라브렌티 감독. [송봉근 기자]

멀리 카자흐스탄에서 온 영화감독에게 사진 촬영을 위해 웃는 표정을 부탁했더니, 좀 색다른 억양의 우리말로 “웃으면 머저리처럼 보이는데”란 말이 돌아왔다.

카자흐스탄 영화감독 송 라브렌티 #다큐 ‘고려 사람’ 부산영화제 초청 #희곡 작가로도 이름난 교포 2세

그렇게 한바탕 웃음을 안겨준 사람은 고려인 2세 송 라브렌티(77) 감독. 소련 시절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나 러시아 모스크바의 국립영화학교를 나온 그는 희곡작가이자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떨쳐왔다. 고려인 강제 이주를 다룬 그의 희곡 ‘기억’은 1997년 초연에 이어 2011년 카자흐스탄 독립 20주년을 기념해 ‘약속의 땅’이란 영화로 제작됐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고려 사람’과 ‘바둘의 땅’은 그가 1990년대 만든 다큐멘터리. 이를 소개한 ‘부산클래식’은 영화사에 의미가 큰 작품을 소개하는 취지로 올해 신설된 섹션이다. ‘바둘의 땅’은 극지방에서 순록을 형제라 부르며 살아온 소수민족의 생활을 이들의 전설과 함께 담아낸 생생한 영상이 돋보인다. 특히 ‘고려 사람’은 각자 다른 민족인 사람들이 고려인처럼 함경도 사투리 닮은 우리말을 유창하게 하는 모습이 퍽 흥미롭다. 심지어 한국 사람처럼 장을 담가 먹는 이도 있다. 감독은 “내가 태어난 동네 주변에선 여러 민족이 고려인과 함께 일하며 한국말을 쓰곤 했다”며 다큐에 나온 이들에 대해 “영화를 찍으려고, 예전처럼 말을 하는지 알아보러 갔다가 만났다”고 전했다.

‘고려 사람’의 한 장면. [부산국제영화제]

‘고려 사람’의 한 장면. [부산국제영화제]

다큐의 배경인 우슈토베는 극동 지역에 살던 한국인들이 1937년 구 소련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하루아침에 옮겨와 황무지를 일구며 살아야 했던 곳. 1941년생인 감독은 이곳에서 11세까지 살았다. 강제 이주 때 헤어진 외할아버지와 외삼촌들을 찾기 위해 어머니가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난 뒤, 어린 그가 매일 우는 모습을 본 형이 어렵사리 여비를 마련해줘 그도 누나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으로 향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가 한 살 때 세상을 떠났다. “돈이 없어서 집을 팔았지. 기래 내 누이가 둘이 어머니를 찾자고 그래서리, 막 찾아갔지”. 그는 러시아어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처럼 간간이 우리말을 섞었다.

성장한 그는 장학금 많이 주는 대학을 찾아 러시아 예카체린부르크의 라디오기술대학을 나온 뒤 시베리아 바르나올의 군수공장에 배치 받았는데, 물자는 넉넉한 곳이지만 문화적 갈증을 풀지 못해 큰 괴로움을 겪었다고 한다. 여러 고비를 거쳐 국립영화학교에 진학한 것은 본래 문학이 하고 싶었던 그가 비슷한 전공인 시나리오 학부를 찾은 결과였다.

당시 그처럼 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고려인 젊은이들을 묻자 그는 “최국인(연출), 양원식(촬영), 김종훈(촬영)”을 열거했다. 이들은 1950년대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에 유학을 갔다가 망명한 북한 출신이다. 3년 전 별세한 최국인 감독이 1982년 카자흐스탄 감독과 공동연출한 ‘용의 해’도 올해 부산클래식에 초청됐다. 중국의 압제에 맞서는 위구르 민족의 투쟁을 대규모 액션과 함께 그린 시대극이다.

다시 말해 송 라브렌티 감독은 카자흐스탄에서 나고 자란 그 세대 고려인 중 영화에 뛰어든 드문 경우다. 그는 “당시 고려인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니까, 예술에 관심 갖는 걸 불필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당신은 왜 문학과 영화에 관심 가졌냐고 묻자 우리말로 “그 모르지, 어찌 조금 차지 못해서(어리석어서), 그저 젊어서”라고 했다. 그럼에도 아버지를 이어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딸 얘기를 할 때는 자랑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국내에 그의 영화를 앞장서 소개해온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 김소영 소장은 “냉전·분단으로 우리가 보지 못했던 중앙아시아, 소련 연방으로 한국과 외부 세계의 경계를 넓히는 굉장히 중요한 문화적 자신”이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중앙아시아·러시아의 고려인을 ‘망명 삼부작’으로 담아온 감독이자 한예종 교수다.

부산=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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