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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이 거는 기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겨울방학도 어느새 보름이나 지나갔다. 그 동안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등 분주한 날들이 지나고 아이들은 벌써 지루한 몸짓이다.
작은집·고모·이모·외할머니 모두 서울에 모여 살고 있으니 방학이 돼도 우리 집 아이들은 갈곳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집안에서 맴돌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나의 어릴 적 생각이 난다.
이북에서 단신으로 피난 내려오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방학이 돼도 갈곳이 없는 4남매를 안타깝게 바라 보셨다.
시골에 친척이나 외가가 있는 아이들이 숙제물과 선물꾸러미를 들고 떠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여러 번 울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대동강변에서 물장구 치고, 고기를 잡고, 닭죽을 끓이던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아버지는 외손자들을 고향강가에 데리고 가시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눈 구덩이 속에서 꺼내먹은 동치미 국물의 냉면 맛이며, 꽁꽁 언 만두를 끓여먹던 설날이야기를 늘 들려주시는 어머니는 이번 설날에도 고향생각에 우울한 하루를 보내셨다.
연휴가 끝나고 새로운 소식을 기대하며 펴든 신문에는 너무나 반가운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남북한을 이을 교통망을 만든다는 커다란 제목아래 금강산과 설악산을 관광지로 연결할 것이며 40년 가까이 끊겨 녹슨 철도와 주요 간선도로를 복구해 필요시 즉각 접속이 가능하도록 한다는 기사였다.
비록 92년에 시행된다는 것이었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부모님의 고향인 평양까지 달려 갈 수 있을 것만 같아 가슴이 설랬다.
외할머니의 고향을 찾은 우리 아이들은 여름방학에는 강가에서 조개를 찾고 물고기를 잡으며 물장구 치기에 어두워지는 줄 모를 것이다.
꽁꽁 열어 붙은 강에서 땀이 흐르도록 얼음을 지치고 눈썰매를 타는 겨울방학은 얼마나 즐거울 것인가.
몇년 뒤가 아닌 올해, 이 새해엔 고향을 잃은 많은 사람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한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박창란<서울 길현동 489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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