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창조와 수면|잠결에 그린 5선지가 명작을 낳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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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꿈에 본 산신령 말을 좇아 백년 묵은 산삼을 캔 이야기, 태몽을 잘 꾸어 옥동자를 낳은 이야기, 그런가하면 어려운 수학문제가 풀리고 위대한 발견을 하게 해준 꿈도 있다. 정말 꿈같은 일이다. 잘 믿기질 않는다. 하지만 이건 대뇌 생리적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한가지 주제를 갖고 골똘히 생각하노라면 잠재의식이 꿈속에서 풀리며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게 해준다.
이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멍하니 넋을 잃은 채 창 밖을 보다말고 문득 기발한 착상이 떠오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무심결에 들은 말 한마디에 『아! 그거다』하고 소스라치게 놀란 경험도 더러는 해봤을 것이다. 이런 정신 현상들은 의식이 명료한 상태에선 일어나지 않는 게 특징이다. 마음이 텅빈 상태, 의식적인 노력이 사라진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잠들 무렵이 창조의 순간이 될 수 있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이때는 의식적인 제약이나 억압이 없어지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낮 동안 억압되고 통제되었던 온갖 상념들이 아무 제약 없이 멋대로 떠오른다. 그 중엔 창피한 생각도 있고 공격·적개심 등 파괴적인 것도 물론 있다. 온갖 잡다한 생각이 흰구름처럼 둥둥 떠다닌다. 이게 입면시의 환시현상이다.
맑은 정신에선 너무 유치해 발표는 커녕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아이디어도 검열이 사라진 이런 순간 자유로이 떠오르는 것이다. 들을 사람도 없다. 비웃거나 비관할 사람도 없다. 이게 창조의 순간이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이런 경험은 창조와 창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겐 흔히 있는 일이다. 작품의 소재를 찾는 화가, 주제를 못 찾아 고민중인 작가, 내일의 강의준비·원고마감을 앞둔 교수·예술가는 이 잠들 무렵의 시간을 무척 소중히 여긴다. 이때가 아이디어의 보고, 창조의 샘이란 걸 익히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정신현상은 잠에서 깨어날 적에도 똑같이 일어난다. 자다말고 벌떡 일어나 원고지를 펼쳐 드는 작가도 많다. 잠결에 들린 음악을 그대로 오선지에 옮긴다. 자다말고 위대한 명작이 탄생되는 것이다.
이런 경험들은 거창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잠자리의 머리 곁엔 항상 원고지와 필기도구, 그리고 전기 스위치를 손에 닿게 두어야한다.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써놓아야 한다. 창조의 순간이나 영감은 오래 가지 않는다. 바로 써두지 않으면 이튿날 아침 까맣게 잊어버린다. 게을러 안 써 두었다간 오래도록 아쉽다. 참으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이튿날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히 깬 후면 의식적 억압이 또 작용하므로 그 아이디어는 다시 무의식 깊숙이 숨어버린다.
최근엔 뇌파조절을 통해 인위적으로 이런 정신상태를 만들려는 시도도 있긴 하지만 잠들 무렵의 창조적 순간은 결코 길지 않다는 게 아쉽다. 당신은 그래도 잠이 안 와 걱정을 하시렵니까. <끝><이시형(고려병원·신경정신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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