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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영화] "사랑이 무슨 죄니" 콩가루 집안 열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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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면

가족의 탄생

출연: 문소리.엄태웅.고두심.공효진.김혜옥.봉태규.정유미

장르: 드라마

등급: 15세

홈페이지: www.familyties.co.kr

20자평: 시각도 주제도 표현도 새로운 가족드라마

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건 참 얄궂은 말이다. 혈연(血緣)보다 진한 인연으로 입양한 자녀를 훌륭히 키워내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차라리 남이었으면 나았을 가족도 있지 않은가. 적어도 21세기는 남자의 핏줄이 지배하는 공동체를 넘어선 유사 가족관계가 속속 등장하는 시대다. 예컨대 혼자 된 할머니들끼리 오순도순 모여 사는 그룹홈을 '가정'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힘들지 않은가. 그런데도 왜 숱한 드라마와 영화가 허구한 날 '출생의 비밀' 주변을 맴도는 걸까.

만일 당신이 이런 주절거림에 조금이라도 귀가 솔깃하다면 이 영화'가족의 탄생'을 강추한다. 아니, 덜 솔깃하더라도 일견(一見)을 권한다. '가족의 탄생'은 모 카드 광고의 문안을 빌려오자면, 혈연을 넘어선 새로운 가족에 대한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다. 시각만이 아니라 형식도 새로우며, 인물의 심리에 밀착된 묘사의 재미 역시 맛깔스럽다.

영화는 언뜻 제각각처럼 보이는 세 가지 에피소드를 병렬적으로 전개하다 이를 마지막에 하나로 잇는 구조를 갖고 있다. 첫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미라(문소리)다. 떡볶이 가게를 하면서 혼자 사는 그녀에게 5년 동안 연락이 없던 남동생 형철(엄태웅)이 들이닥친다. 마치 어제 헤어진 듯 뻔뻔하게 웃는 형철 옆에는 20살 연상의 애인 무신(고두심)이 군식구로 따라온다. 형철과 무신의 닭살스러운 애정행각에 미라가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 며칠 뒤에는 어린 소녀 채현까지 찾아온다. 이 소녀, 무신의 전 남편의 전 부인의 딸이라니, 참으로 족보 따지기 어려운 관계다.

두 번째 주인공은 사회 생활은 똑 부러지는데 가족사와 연애사는 영 질퍽거리는 여자 선경(공효진)이다. 선경이 남자친구 준호(류승범)와 삐걱대는 것과 달리 쉼없이 사랑에 빠지는 엄마 매자(김혜옥)는 요즘도 웬 아저씨와 열렬히 연애 중이고, 어린 아들 경석까지 두고 있다. 선경에게 이런 엄마와 의붓동생은 당연히 정보다는 화부터 나는 징글징글한 가족이다.

세 번째는 청춘남녀 경석(봉태규)과 채현(정유미)이다. 둘은 공식적인 연인 관계이지만 남의 대소사를 내 일처럼 챙기는 채현의 오지랖 넓은 성격이 문제다. 정작 남자 친구인 경석은 애정 결핍증을 토로할 정도다. 일종의 반전이라고 할 만한 이 영화의 결말은 이 기묘한 애정의 근원을 앞서 두 에피소드에서 출발한 가족사와 연결짓는다.

이런 구성상의 연관을 떠나서도 세 사연에는 공통점이 있다. 누군가의 맹렬한 애정 때문에 다른 누군가는 고통 받는다는 것이다. 에피소드마다 거듭되는 대사는 이 모순을 한마디로 대변한다. "네가 나한테 왜 이래." 영화는 새로운 유형의 가족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함축적 세월로 표현하는 대신, 이 같은 애증의 밀도를 각각 현재형의 섬세한 심리묘사로 그려낸다. 이 영화를 가족이든, 연인이든 '사랑'때문에 겪는 상반적 심리에 대한 근접 관찰기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다시 가족의 기반을 혈연보다는 사랑으로 정의하는 이 영화의 시각과 이어진다.

저마다 이름값 하는 여러 배우에게서 고루 호연을 뽑아낸 점도 감독의 돋보이는 연출력이다. 일례로 첫 번째 에피소드는 한참 연하의 애인과 사랑에 달뜬 심경을 트로트 가락에 섞어 표현하는 고두심, 그런 모습을 내놓고 싫다고 못하는 대신 코맹맹이 목소리에 마뜩찮은 심정을 담는 문소리, 대책 없이 즉흥적인 삶의 방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엄태웅, 이 셋이 모두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물론 관객의 취향에 따라서는 이 같은 강력 추천에 이의 제기할 대목도 없지 않다. 기승전결의 전통적인 화법을 따르지 않는 전개방식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그렇게 된 이력에 대한 풍부한 설명 없이 '콩가루 집안'들만 등장시키는 것이 작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극중 가장 노릇을 해야 할 남자들이 대체로 부재 중이거나 무책임하고, 그래서 결국 여자들이 고스란히 가족의 짐을 떠맡는 것이 '새로운 가족'을 말하는 영화로서 한계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하나 더 권하자면, 이 영화를 스크린에서 만나려는 관객은 서두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할리우드 대작영화와 다른 한국영화의 줄개봉을 앞둔 마당에 이 새로운 감성의 영화가 얼마나 오래 극장가에서 버텨낼지는 미지수라서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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