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멈추어 생각하자|김상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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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격동의 세월 속에서도 한해가 어김없이 저물고 있다. 지난 1년도 다른 나라들 10년 살듯할 엄청난 시련과 변화를 잘도 견뎌냈다.
권위주의시대가 종막을 내리면서 사회도처에서 관료적 경직성이 부단히 깨지고 있다. 민족자존의 문제가 강력히 제기되는 가운데 사회갈등들이 복잡하게 엉켜들기 시작했다.
참여정신이 집단행동으로 표출되면서. 점거농성과 폭력행태가 확산일로를 걷고있다.
이 복잡한 소란 속에서도 세밑에 이제 우리는 근본질문을 해볼 때가 됐다. 아니, 거듭 거듭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는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불의와 부정직의 지배로부터 진정한 민주화·인간화의 시대로 옮겨가는 도정에서의 불가피하고도 유익한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반 이성의 혁명적 소요로 치닫는 초입에 서있는 것인가.

<분출하는 사회갈등>
우리는 우선 최대의 현안문제들을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할 기로에 있다.
의견들은 대세를 이루어가기 보다 심각하게 나뉘고 있거나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경꾼 심정으로 훈수를 두거나 목소리 높여 외치기는 쉬울지 몰라도 책임감을 가지고 생각할수록 정말 어렵다. 과연 무엇이 정론이며 정도인가.
무릇, 바를 「정」자는 멈출 「지」자에서 비롯된다. 정은 바로 이 「지」라 하였다. 한번 멈춘다는 뜻이다.
시대의 난제 앞에서 우리는 먼저 과거의 관념들을 고집하기보다 한번 멈추고 문제의 근본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할 것 같다.
첫째, 누구나 주장하는 「5공 단절」의 문제다. 우리는 진실로 뼈아프게 불의와 비리의 과거를 참회하고 다시는 이에 영합하지 않는다고 다짐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역사에서 제5공화국을 끊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5공은 실재였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봤고 견디었다. 지금의 이 시대도 같은 뿌리의 그루터기에서 나왔으며 우리의 생활 모든 것이 그때를 넘어 지금으로 이어져 있다. 5공의 「법대로」식 법 만능은 지금의 시대풍조, 즉 법률과 제도의 개폐만으로 사회가 일신되는 듯한 착각을 가져온 셈이다.5공의 물리적인 공권력은 지금의 물리적인 다중압력을 키워냈다.
5공 단절을 아무리 부르짖어도 한계가 있을 것임은 바로 우리 자신들에게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수구세력이나 기득권계층의 한계일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변혁」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저항세력이나 피해집단이라 해서 다를 바는 없다. 저항정신으로만 편집되어 있거나 과거의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온전치 못하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같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와 단절할 수 없다. 다만 극복할 수 있을 뿐이다.
둘째, 민족정기를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가. 5공시대의 상징인물인 전두환씨가 권세가 다 떨어진 채 산사에 칩거하는 것만으로는 후일의 경계로 삼을 수 없으니 사법적 처단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최소한 국회청문회 증언대에 세워 추궁을 하며 면박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단절보다는 극복을>
그러나 과연 역사상 프랑스적인 분노의 칼이 옳았던 것인지, 아니면 영국식의 명예혁명이 올바른 것이었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모습은 국민수난·분단비극과 이념대립으로 몹시 상처받고 굴절돼 있다. 또 한번 정의의 칼이 휘둘러지기보다 오히려 위로와 희망을 갈망하고 있는 것 아닌가. 우리에게 절실한 민족정기의 과제는 흑백논리가 아니라 바로 정직성의 회복과 약속의 존중이 아닐까 한다.
정직하게 말해서 전두환 전대통령을 예컨대 5공의 출범과정이나 정치자금의 뒷거래를 이유로 사법 처단한다면 이것이 바로 정치보복이 아니고 달리 무엇이 정치보복인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정치인들 모두가 결단코 정치보복은 않겠다고 누차 약속했었다. 공인은 그 어떤 폭력이나 세론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애꿎은 「국민의 뜻」에 핑계 댈 일이 아니다.
만일 천하대권을 바라보는 이가 중대한 약속을 파한다면 나라의 정기 역시 파가 된다.
셋째, 광주민주항쟁의 비극적 한을 어떻게 해소시켜야 하나. 자료와 청문회과정을 통해 처절했던 진상과 유언의 대체적인 줄거리가 드러났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책임자들을 단죄의 자리로 끌어내어 윽박지르고 수모를 주며 징역을 살린다 한들 한때의 분풀이는 될지언정 진정한 마음의 위로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지역적 대립감정의 골이 더욱 깊이 패지나 않을지 염려된다.
더욱이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래도 비극을 넘어 더불어 한마음으로 어울리는 화해의 날이 올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물론 결자해지여야 하리라. 그러나 가해자로 몰아칠 때 진정 반성하는 사람 드문 법이다. 만일 피해본 목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이제는 용서해 주자는 운동을 벌인다면 어떻게 될까. 가해자 그룹은 그것 보아라 하면서 으시댈까, 아니면 더욱 부끄러워져 진정한 반성을 하게될까.
용서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용서받아 마땅한 사람에게 하는 용서는 달리 값나가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 속에서의 관용은 스스로에게 평안함을 되찾게 하고 가해자에게는 참회의 아픔과 화해의 갈구를 가져오게 한다.

<우선 개인혁명부터>
이제는 현안문제들을 마무리지어야 한다. 우리 앞날에 파도처럼 밀려드는 난제들을 감당키 위해, 마음의 각오를 새롭게 단단히 하기 위해서이다. 합의헌법에 의한 직선대통령의정부에 대해서도 계속 정통성을 시비하는 주장 같은 것은 뒤로하고 이젠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을 준비해야 한다.
그 준비의 가장 큰 일은 무엇보다 우리들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지기 시작하는데 있다. 허위와 아부와 영합에 길들여지고, 없는 사람 낮은 사람 업신여기며, 허영과 놀이에 빠졌던 길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 혁명은 사회에 대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모두의 자신에게 절실한 것이다.
이제 거듭 태어난 자세로 제도와 조직을 개혁해 나가고, 도저히 구제할 길 없는 수구파는 족집게로 집어내 가면서 세계사의 모범이 될 인간다운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길을 닦아 나가야 한다. 이는 추상적인 구호나 감상의 외침이 아니다. 모든 단련을 거치고야 나오는 정금 같은 것의 바람이다.
승리는 오로지 긍정하는 삶에 있을 것이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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