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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크기·취급방법까지 간섭"|국회 「언론청문회」지상중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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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5공화국 기간 중 언기법 제정 및 보도 지침 등 광범위한 언론정책전반에 관해 질문 공세를 편 12일의 국회문공위 청문회는『말』지를 발간, 보도지침에 관한 내용을 처음으로 공개한 김주언·김태홍·신홍범 씨 등으로부터 증언을 먼저 들은 뒤 정부관계자의 증언을 듣는 순으로 진행.
이날 청문회는 지난번 청문회와 마찬가지로 증인들을 4그룹으로 나누어 출석시켜 진행됐는데 2그룹에는 언기법 관계자인 이광균 전 문공과 박용상 부장관사, 3그룹으로는 이진희·이원홍 전 문공, 4그룹으로는 허문도씨가 출석.
특히 그 동안 5공화국 출범초기부터 언론정책에 깊이 관여했으나 청문회에는 한번도 출석한 일이 없었던 이진희씨가 나와 눈길을 끌었고 허씨에 대해서는 역시 「독상」을 마련해놓고 있다.
이날 회의부터 문공 의원이 일부 교체돼 민정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이종찬 의원과 몸이 불편한 것으로 알려진 김동영 의원(민주), 그리고 이협(평민) 최각규·김인곤(공화)의원 등 5명이 사임하고 대신 남재희(민정) 조세형(평민)백남치(민주)윤성한·신진수(공화)의원 등이 문공 위원으로 활동.

<김태홍·신홍범·김주언 씨 증언>
◇강삼재 의원(민주)신문
-(김주언씨에게)언제 언론사에 입사했나.
▲김주언씨=한국일보에 80년4월 입사했다.
-당시의 각오는.
▲김주언씨=10·26이후 사회의 민주화과정에 언론계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언론 자유가 성취되면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고 본인은 조그만 보탬이 되고자 했다.
-보도지침 사건은 언제 있었나.
▲김주언씨=86년6월 『말』지에 보도 지침을 폭로한 후 그해 12월에 구속됐다.
-당시의 근무 부서는.
▲김주언씨=한국일보 편집부에 있었다.
-85, 86년의 언론상황은.
▲김주언씨=당시 편집부에 근무했었기 때문에 정부의 언론간섭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정보기관에서 편집국에 요원을 상주시켰고 보도 하나 하나에 간섭했다. 문공부에서 홍보조정실 또는 홍보정책실을 통해 홍보조정지침을 내려보내 일일이 간섭했다. 한마디로 언론통제가 극에 달한 암울한 시절이었다.
-언론통제의 구체적 방법은
▲김주언씨=보도지침뿐만 아니라 언론인들에 대한 개별적 접촉을 통해 지침이 하달됐다. 보도내용에 잘못이 있을 때 기자를 불법연행, 정보기관에 끌고 갔다. 특히 75년 동아일보 광고사태이후 경영진에 대한 경영간섭의 형태를 통해서도 언론통제가 이루어졌다.
-보도지침이란 원가.
▲김주언씨=구체적 사안에 대해 「취급하지 말라」「작게 보도하라」「크게 보도하라」「사진을 쓰지 말라」는 등 기사에 대한 간섭이다.
-전달경로는.
▲김주언씨=홍보조정실에서 공식적으로 맡고있으나 청와대공보수석·안기부 등이 협의해 지침을 내려주면 관계관이 유선이나 접촉을 통해 언론기관에 전달한다. 또 각 기관 기관원들이 찾아와 기자나 편집국장에게 전달한다.
-언론기관에 나와있는 기관원은 몇 명이나 되었는가.
▲김주언씨=한국일보의 경우 안기부1명, 보안사1명, 홍보정책실1명, 치안본부1명, 종로서 등 많은 때는 7명 이였다.
-홍보정책실 파견 관은 직접문서를 가지고 한국일보에 전달했는가.
▲김주언씨=문서를 직접 전달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홍보정책 파견 관이 하는 일은.
▲김주언씨=보도내용을 어떻게 하라, 제목은 어떻게, 사진은 어떻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젊은 기자들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이들은 대부분 언론인 출신인데 언론계 선배로서 언론을 통제했다는 말인가.
▲김주언씨=그렇다.
-그 이유는.
▲김주언씨=언론계 출신만이 언론계 내부에서 하는 일, 위계질서, 분위기, 제작사학 등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을 채용한 걸로 본다.
-보도지침은 사장에게 전달되는가, 아니면 편집국장에게 전달되는가.
▲김주언씨=사장실보다 편집국 최고책임자나 각부서 데스크에 보고됐다.
-그 내용은 경영진에게 보고되는가.
▲김주언씨=한국일보의 경우 보도지침 내용을 유선으로 받아 적어 보관했다가 부장·경영진·논설위원 등이 돌려봤다.
-언론사가 보도지침에 속수무책으로 행동했다고 할 수 있는가.
▲김주언씨=보도지침이 하달되면 1백% 이행되는 건 아니다. 편집국 내 간부들이 보도지침이 정당치 못하면 이에 반발, 예를 들어 보도하지 말라는 것을 1단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서강대연구원에 따르면 보도지침이 70∼80% 반영됐다는 얘기가 있다.
보도지침이 내렸을 때 야간작업 때까지 계속 전화가 없고 기관원이 찾아와 확인하는 경우는 있었다. 보도지침을 안 지켰을 경우 경영진에 대해선 광고문제로 협박해 견딜 수 없게 하고 문공 장관이 신문사등록취소·정간 등 행정명령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선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정도 반발, 나름대로 보도하긴 했으나 구조적인 통제가 있었던 것이다.
-보도지침 10개월 치를 어떻게 모았나.
▲김주언씨=한국일보의 경우유선으로 내려온 것을 편집국간부가 모아 이를 적어 복사해 보관한 적이 있었다. 이를 편집국 서무 책상 위에 보관해 누구나 볼 수 있게끔 했었다.
-보도 지침을 폭로하려 했던 이유는
▲김주언씨=85∼86년 당시는 민주화·개헌운동·학생운동의 열기가 고조됐을 때였다. 신문들은 거의 똑 같은 논조로 학생운동을 좌경용공으로 매도하고 농민운동 같은 걸 폭력시위로 매도했었다.
신문사의 자의적 판단이 아닌 정권안보를 위해 강압적인 상황이었고 이런 식으로 보도 할 수밖에 없었다.
언론이 보도를 충분히 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이를 알려주고 민주화운동을 올바르게 잡기 위해서였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에 내용이 알려진 경위는.
▲김주언씨=이 협의회는 70년대 해직된 동아·조선기자와 80년 강제 해직된 기자들이 모인 단체다. 민주·자유·민족언론을 지향하는 단체로. 내가 생각하는바와 같아 그랬다.
-누가 먼저 연행됐나.
▲김주언씨=김태홍 선배가 먼저 연행됐고 나는 5일 후에 연행됐다.
-보도 지침을 협조사항이라 했는데·‥.
▲김주언씨=이원홍 당시 문공장관은 보도지침이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라고 계속 얘기했으나 언기법이란 신문사의 등록취소까지 할 수 있는 폭력적 악법이 있는 한 보도협조라고 할 수 없다. 정부측에선 보도협조라고 했으나 기자를 연행, 구타한 것으로 보아 강제적 지시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구속기간은 얼마였나.
▲김주언씨=6개월 여다.
-재판절차는 어떤가.
▲김주언씨=경찰에서는 국가보안법상의 국가기밀누설죄가 적용됐다. 검찰에서는 외교상 기밀누설죄로 바뀌었다. 몇몇 가지고 있던 책자를 불온서적 소유라며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는데 정치적 악용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1심에서 징역8년 집행유예 1년6월 자격정지 1년을 받았는데 법리적용 상 문제점도 있을 뿐더러 이러한 사실 자체가 언론자유 및 민주언론을 해치는 판례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판단 때문에 항소를 했고, 현재 항소심에 계류중이다.
◇박관용 의원(민주) 신문
-어떤 사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이 적용됐나.
▲김태홍 씨=80년 봄이래 보안법·보안사·안기부 등의 개념은 항시 위협을 가지고 몸 가까이 느껴왔기 때문에 보도지침 사건 때도 으례 그러한 법으로 엮으려니 했을 뿐 어떤 조항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됐는지 생각도 안 해봤다.
-신홍범 증인은 『혁명영화』라는 책을 소지했다는 사실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이 됐는데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신씨=당시 두레출판사를 경영했는데 출판상 참고자료로 있던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영화운동을 소개한 것으로 현재 번역돼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다.
-국가기밀누설죄는 어떤 이유에서인가.
▲신씨= 『말』지에 폭로된 보도지침사항 6백88개 대부분이 정권안보와 관련된 것인데 그중F-15기 구매 과정에서 한국고위관리가 미 항공사에 뇌물을 준 사건이 미 하원청문회에서 조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와 관련한 사항의 보도지침을 폭로했다는 것이 국가기밀의 주 내용이며 기타, 국내외신문에 공개된 사항 10개항도 문제가 됐다.
-김태홍 증인은 5·17후 연행됐는데 무슨 죄명이었나.
▲김태홍 씨=80년8월27일 연행돼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는데 붙들리기 전엔 포고령 위반만 잘못인 줄 알았으나 잡혀가 보니 그 외에 김대중씨에게 자금을 받은 것, 불온서적을 소지·유포한 것, 교우관계 등 모두 5개항이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포고령과 반공법을 위반한 경합 범이었다.
-신홍범 기자는 조선일보 외신·문화부에 재직하면서 편집권 침해이유로 해직 당한 사실이 있는가.
▲신씨=전두환 시절에는 언론탄압이 극심했으나 74년 재직당시에도 극심했다. 중앙정보부 요원이 신문사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기사를 넣어라 빼라 간섭했고 동아일보에 출입하던 방준필이라는 중정 요원은 중요기사 내용에 간섭, 편집국장 행세를 해 방준필을 「방주필」이라 할 정도였다.
유신 철폐·민주화운동·학생데모·민권운동 등은 일체 보도하지 못했으며 용어자체도 학원데모를 학원시위로, 물가인상을 물가현실화로, 중앙정보부 등을 모기관으로, 부정부패를 사회부조리로 고쳐 표현하게 했다.
-6개월 이후에 조선일보의 상당한 숫자가 해직됐는데 당시 상황을 말해달라.
▲신씨=74년12월18일 나와 백기범 기자가 기사에 항의한 이유로 파면됐는데 동료 조선일보 기자 둘은 이 해고에 항의, 그날 저녁부터 제작 거부 농성에 들어갔다.
회사측은 나와 백 기자를 75년3월5일 창간 기념일까지 복직시키겠다고 약속해놓고 나중엔 「원칙척으로 약속한 적 없다」며 거부, 조선일보 전체기자들이 3월1일부터 제작 거부농성에 들어가 권력과 손잡은 사주 측은 자유언론을 외치는 기자 34명을 대량 해고시켰다.
-75년 광고탄압, 75년6월 언론인해직, 80년 언론통폐합 및 해직, 86년 이후 보도지침 등 언론의 암흑기는 서로 관계를 맺고있고 오늘날 언론기업의 거대화를 가져온 걸로 보는데.
▲신씨=나뿐 아니고 동아·조선 투위의 일치된 견해다. 75년 동아·조선사건을 기점으로 한국언론은 본격적으로 제도 언론화 했다. 경영진에 의해 언론은 자기부정이 되고 권언 복합체가 이루어져 전두환씨가 이를 완성했다. 따라서 동아·조선사태의 해결 없이는 제도언론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최근 언론은 5공의 언론탄압 피해자일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학생·근로자들이 고난 속에서 민주화를 쟁취하고 있을 때 언론은 무엇을 했는가.

<4면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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