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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6)능악 일으킨 관아미는 고구려 후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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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일본에 전한 기악은 미마지 이래 각 사찰과 민간에 남아 그 목적과 형식을 달리해갔다. 혹은 각종 염불놀이와 봉오도리(분용), 기타 잡극과 전통연극 속에 그 일부를 전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쿠라이(나량현 앵정)시의 「토무대」에는 지금도 관세·보생·금강·금춘 등의 4대 유파인 능악단체들이 해마다 번갈아 가며 10월 중추 보름가까이 해서 토무대 현창회를 찾아 달밤에 횃불을 밝히고 그 아래에서 하던 다기키노(신능)와 카리노(훌능) 등을 기념으로 연출하고 돌아간다고 한다.
그만큼 그들 능악단체들은 이곳이 그들 능악의 탄생지이자 발상지로 믿고 있다. 지금 「토무대」란 현영비가 있는 이곳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일대가 전부 시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공연은 그 토무대가 있는 바로 아래 사쿠라이 소학교 교정에서 이루어진다. 그들 단체는 마치 고향을 찾는 것처럼 명예롭게 생각하며 시 상공관광과의 협력을 얻어 해마다 한번씩 공연하고 있다.

<도래인 모여 살아>
『이곳 사쿠라이와 인접한 곳에는 옛날 이하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곳은 기악의 뒤를 이어 일본 전통연극의 실질적인 개혁과 완성을 이룬 강아미(관아미)의 고향과 그의 능악창좌지지가 있었다고 들었다』(김달수=『일본 속의 한국문화』). 관아미 그 조상은 한반도로부터의 도래인이 라는 것이다.
그밖에도 이곳은 지명·산명·인명 등이 모두 우리나라와 관계된 이름들이 많을뿐더러 옛 삼국시대로부터의 도래인 집단이 거의 이곳을 차지하고 살았다고 한다.
필자는 나량현과 삼중현 남단을 돌아 쓰시(율시)에 와서 이곳 한국교육원의 이용일 원장과 함께 그의 차로 우선 이하의 우에노(상야) 쪽을 향해 달렸다. 북서대륙으로 54km, 상당한 거리였다. 이곳은 삼중현에서도 가장 산중 마을로 나량와 대판목이 거리상으로는 보다 가까와 그 예전에는 야마토 조정의 생활·언어·풍속이 번졌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은 일찍이 야마토(대화)에 상륙했던 우리 귀화인들에 의해 관개기술이 발달하고 이로 인해 곡창지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고장은 자연 그 지명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고구려인의 집락처가 되어갔던 것이 사실이다.
그 앞을 흐르는 복부천의 이름은 「핫도리(복부)」라는 성씨에서 온 것으로 핫도리란 성은 원래 「구레하도리(오직)」, 즉 「하다오리」(기직=베짜는 기술자)를 전업으로 하던 「구레(오)」, 즉 「구려」=「고구려」인의 후예라는 뜻이다. 『상야시사』에 의하면 이 복부천부근을 중심으로 한 복부씨족은 이곳의 호족으로서 그 옛날 이하 일대에서는 모든 기술과 기능, 기예 면에서 뛰어났던 씨족으로서 지금도 가는 곳 마다에는 「복부 양복점」 「복부 약국」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호와 간판들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오곤 했다.
상야성 밑에 우선 차를 세워두고 우리는 먼저 성을 오르기 앞서 그곳 인음야시키(미부)에 들러 전국시대부터 있어온 그들 나름의 독특한 무술과 신출귀몰 하는 술수 및 그 둔갑술에 필요한 도패들을 진열해 놓은 밀실을 돌아보았다. 이들도 말하자면 그 조상은 핫도리씨족으로서 그 개조는 성덕태자의 개인 탐정이었던 대반세인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다시 차를 몰아 복부반장의 사가가 있는 도모노(지생)를 지나 이곳 복부씨의 조신을 모시고 있다는 아에구니(감국) 신사로 갔다.
안내판에는 일명 이하 이치노미야(일의궁)라 하였고 여기에 합사된 신들 가운데 복부씨의 시조 소언명신과 금산완이신의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이 신사에는 해마다 한번 「흑당제」라는 가을 제례가 열리는데 이는 복부성씨를 가진 자들끼리 그 조신을 섬기는 놀이로 모두가 검정색 인자의 복색을 하고 노는데서 온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을 나와 다음 목적지인 나바리(명장)시까지는 약 25km, 30분 거리였다.
이곳을 찾은 목적은 우리나라 가야금(그들은 「당금」이란 한자를 써서 「가라고도」라고 발음한다. 여기서의 「가라」는 즉 가나·가야를 이르고 있다)을 신체로 모시고 있다는 야바다(팔번) 신사를 우선 찾고, 두 번째는 「관아미의 창좌지지」로 알려진 오바다(소파전)란 곳을 찾는 일이었다.

<외딴섬 신녀 전설>
시가를 벗어나 험한 산길과 천수답을 끼고 꼬불꼬불한 교외 길을 20여분쯤 달려 팔번에 닿았다. 차를 세운 뒤 좁고 가파른 층계를 올라가니 하늘을 찌를 듯한 삼목 사이로 「팔번정팔번궁」이란 현판을 단 작은 신사하나가 있으나 몹시 퇴락한 모습이었다. 이곳 향토 연구가이자 민화 전설집을 내고 있는 「마쓰시카」(송록조이·명장서고교 교유)씨는 그의 『나바리의 옛이야기』 책에서 그 전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그 옛날 대화와 이하 경계에 있는 야하다천의 어떤 외딴 섬에 어느 날 신녀가 나타나 아름다운 소리의 당금을 켜고 있었다. 그 소리에 이끌린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이르자 그녀는 금을 바위 위에 놓아둔 채 그 모습을 감추고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당금을 가지고 돌아와 팔번신사에 모셨다고 한다. 그리고 한편 「삼국지지」에는 이곳을 일러 「하나곤토」라고 써서 「가라고도」라고 읽고 있으나 이는 한국의 가라 가야의 고토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당금은 일명 「당금명신」이라고도 불렀다.』
이 전설은 마침 작년에 필자가 강산현 우시마토(우창)를 방문하였을 때 그 앞섬인 전도와의 해협을 일명 「가라고도(당금)의 뇌호」라고 부르고 있으며, 또 「루리히메」(유리희) 전설과 「조선장대명신」 전설이 뒤얽힌, 삼한의 옥자당금을 찾아 이 해협을 표류하는 여인의 그 이야기와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는 전설로서 흥미로왔다.
당금을 두고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는 그 여인은 필시 우리와 관계 있는 「당금의 뇌호」에 표류하던 그 여인이 아닌가 싶었다. (1988년 1월 26일가 중앙일보 참조)
이곳을 내려와 다시 명장에서 일박할 요량으로 교위의 두 분과 함께 관아미가 처음 무대를 열었다는 그의 창좌지지를 향해 차를 몰았다.
현도 612호선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가미오바다(상소파전)와 시모오바다(하소파전) 사이, 한 등성이를 오르기 전에 「복전신사적 능악대성자 관아미창좌지지」란 입간판이 서있고 그 등성이를 좇아 오르니 거의 세모난 큰 반석 전면에는 역시 「능악대성자 관아미창좌지지」란 비문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뒷면에는 그의 아들 세아미가 아비의 가르침을 담은『유악담의』중의 한 귀절이 새겨져 있다.

<30세쯤 일가 이뤄>
시 관아미현창회에서 나온 『관아미 모노오타리』에 의하면 그는 이하국 아소다(아소전=지금의 명판국도 모리타 인터체인지 부근)의 호족 「핫도리 모도나리」(복부원성)의 삼남으로 그의 본명은 복부삼랑청차였다고 한다.
복부씨에 대해서는 이미 그 원조가 고구려계 귀화인임을 설명했거니와 이렇게 되면 그는 한국인의 후예임이 틀림없다. 그는 어려서 하세(나량현 장곡)의 예인집단에 입문, 그곳 야마토와 오우미(근강=자하현), 셋쓰(섭률=대판부), 단바(단파=병고현) 등지에서 크게 대성하여 그의 나이 30세 전후 처가가 있는 오바다(소파전)에 돌아온다.
그곳에는 그의 장인이자 영주인 「다케하라·다이가쿠」(죽원대각) 법사가 살고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이곳에 새로운 일좌를 개설하니 이것이 곧 지금에 남아있는 그의 「창좌지지」가 되었다. 지금의 비석은 그 제막식이 있은 지 불과 20여년(1964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곳은 지금도 한 자 높이의 토무대를 만들어 현창회에서 20년째 매년 10월 첫째 일요일을 골라 관세류의 능악 기념공연이 있다고 한다.
다음날 나바리역에 나오니 그 광장 중앙에는 그의 비석 뒷면에 새겨진 글귀에서처럼 오키나(옹면) 가면 하나를 가슴에 안은 관아미의 동상이 서있는데 그렇게도 인상적일 수가 없었다. 또 이 시에서는 그를 그만큼 자랑스럽게 여긴다는데 대하여 필자는 무엇인지 모를 뿌듯한 감회를 안고 이곳을 떠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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