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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즈음에’와 ‘스물여덟 즈음에’의 차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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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스물여덟 즈음에’나 ‘서른둘 즈음에’로 발표됐어도 그토록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스무 명 넘는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음악평론가들에 의해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며, 발표된 지 25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18번으로 불리는 이 노래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노래 중 하나이다. 서른 즈음인 사람들만이 이 노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마흔 즈음이나 쉰 즈음이 된 사람들, 심지어 스물 즈음의 젊은이들도 삶이 울적할 때 이 노래를 부른다.

‘아홉수 조심하라’는 말에 숨은 심리학적 의미 #10살 단위로 삶을 구분하고 의미를 찾는 인간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엔/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또 하루 멀어져 가는’ 시간의 흐름은 늘, 그리고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자연 현상이다.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라며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행위도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정신 작용이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공허함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왜 유독 서른 즈음일까? 그러고 보니 최영미 시인의 시집 제목도 ‘스물여덟’이 아닌 ‘서른, 잔치는 끝났다’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나이를 10년 단위로 끊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모든 범주적 사고가 그렇듯이, 사람들은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등으로 나이를 범주화하고는, 같은 연령대 사람들끼리는 서로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연령대 사람들은 마치 극복하기 어려운 차이점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29세와 31세의 차이는 31세와 33세의 차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고 생각한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10년 단위로 나이를 구분하는 습관 때문에, 다음 10년으로 넘어가는 아홉수 나이가 되면 사람들은 생각이 많아진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 고민하고, 자기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 시기에는 새로운 연령대에 진입한다는 기대와 더불어 나이 듦의 자각에서 비롯한 불안과 우울감이 찾아온다. 지금껏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을 헤아리게 되니 자괴감도 찾아온다. 신체의 변화도 한몫을 거든다. 48세에서 49세로의 신체적 변화와 49세에서 50세로의 신체적 변화의 차이가 그리 클 리 만무하지만, 50이 되면 ‘50이 되니까 신기하게도 몸이 다르다’는 체험을 한다. 동시에, 더 늙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에 대한 도전도 많아진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다음 10년의 연령대로 진입하기 직전인 29·39·49·59세 같은 아홉수 나이의 사람들은 같은 연령대의 다른 나이의 사람들에 비해 마라톤을 시작하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은 것이다. 또한 미국의 자살자 통계를 분석한 발표에 따르면, 아홉수 나이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살할 확률이 조금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뿐 아니다. 가정이 있는 사람들에게 은밀한 데이트를 연결해주는 유명 사이트에는 아홉수 나이의 사람들이 우연이라고 하기엔 수적으로 유의미하게 많았다고 한다. 물론 이들이 아홉수 나이에 그 사이트에 최초로 가입한 것인지, 아니면 그 전에 이미 가입한 것인지 분명치 않기 때문에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지만, 더 늙기 전에 일탈을 경험하려는 심리가 존재함을 짐작해볼 수 있다. 아홉수를 조심하라는 전통적인 금기에는 이 같은 심리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인간은 왜 이처럼 10년 단위로 삶을 구분하고, 10년의 경계 지점에서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성장하는 것일까? 이는 인간이 의미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란 무질서해 보이는 것들 속에서 특별한 패턴을 발견하는 일이다. 시간의 흐름은 늘 일정하다. 특별한 패턴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의 일정한 흐름을 구분하여 의미 있는 패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패턴에 삶을 맞추어 살아간다.

마흔이 되면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결심하고, 쉰이 되면 하늘을 뜻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결심한다. 시간은 단 한 번도 우리에게 그 점을 강요하지 않았다. 우리 스스로가 시간을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쪼개고 각각에 서로 다른 이름들을 붙이고는 그 이름에 걸맞은 의미를 추구하려고 할 뿐이다. 인간은 의미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인간의 뇌는 의미를 발견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경계에 서 있다. 계절의 아홉수에 서 있는 셈이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을 지나온 까닭일까, 가을의 경계가 유독 선명하게 느껴진다. 이번 가을에는 책을 읽자고 다짐해본다. 이번 가을에는 편지를 쓰겠다고 다짐해본다. 이 다짐이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리고 그 전전 해에도 똑같이 반복되었던 것임을 알지만, 그 사실에 자책하기보다는 시간의 경계들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의미의 경험과 성찰의 기회에 감사하고 싶다. 모든 경계는 성찰의 기회이다. 여행으로 경험하는 공간의 경계가 그렇듯 나이 듦으로, 계절의 변화로 경험하는 시간의 경계도 그렇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