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만의 철도용어 표준화 “부산 아재가 했다 아잉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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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만에 철도 용어 15개를 우리말로 바꾸는데 성공한 부산교통공사 김상철 계획설계팀장(왼쪽)과 김철홍 대리(오른쪽). 앞으로 지하철 내 상단에 적힌 '편성'은 '열차'로 바뀐다. [사진 부산교통공사]

120년만에 철도 용어 15개를 우리말로 바꾸는데 성공한 부산교통공사 김상철 계획설계팀장(왼쪽)과 김철홍 대리(오른쪽). 앞으로 지하철 내 상단에 적힌 '편성'은 '열차'로 바뀐다. [사진 부산교통공사]

27일 국토교통부는 법령과 공문서, 교과서에 철도 분야 용어인 주재소를 관리소로 바꿔 쓰기로 했다. 주재소는 일제 강점기 때 순사 등이 일정한 구역에 머무르면서 사무를 맡아보던 곳을 의미하는 일본식 표현이다. 이 외에 량→칸, 핸드레일→안전손잡이, 편성→열차, 승계운전→교대운전처럼 14개 용어도 우리말로 바꿨다. 총 15개 철도용어가 우리말로 바뀐 것이다. 철도 분야 용어가 공식적으로 우리말로 바뀐 것은 일본이 한반도 식민지배를 위해 1899년 국내에 철도를 건설한 이후 120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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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우리말 표준화 작업을 이끈 주인공은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부산교통공사 김상철(49) 계획설계팀장이다. 부산 토박이로 1997년부터 부산교통공사에서 일해 온 그는 지난해 3월 신임 권준안 건설본부장에게 업무 보고를 하다 혼쭐이 났다고 한다.

그는 “주재소 용어를 사용하자 본부장이 철도 용어에 일제 잔재가 너무 많다며 고치는 게 좋지 않으냐고 호통을 치더라”며 “시대에 맞지 않고 시민과의 소통에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에서 철도 용어를 바꿔보자며 일본식 표현이나 외래어, 한자어를 추려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신규노선 계획 업무 등을 담당하는 그는 일과가 끝난 뒤 철도 용어집을 들췄다. 지난해 4월부터 두 달간 자정까지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 총 140여개의 단어를 추려냈다. 이어 한국철도시설공단, 코레일, 철도협회 등 30개가 넘는 유관기관에 일일이 공문을 보내 1차 의견 수렴에 나섰다. 그리고는 지난해 6월 ‘전국도시철도 운영회의’에 철도용어 표준화 작업을 안건으로 올렸다.

반응은 뜨거웠다. 김 팀장은 “여러 기관에서 철도용어가 너무 어렵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고 전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국립국어원 조언을 받고 철도 업무 담당 부처인 국토교통부의 승인을 받기 위해 김 팀장은 20여 차례 세종과 서울로 오갔다. 표준화 작업을 위해서는 상위기관의 심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심의를 앞두고는 시험에 통과해야 하는 학생처럼 자정까지 수시로 공부하고 당일 새벽 6시에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어 심의 때 자세히 설명해야 했다”고 그간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이 모든 일정에는 부산교통공사 김철홍(34) 대리가 함께했다.

120년만에 철도 용어 15개를 우리말로 바꾸는데 성공한 부산교통공사 김상철 계획설계팀장(왼쪽)과 김철홍 대리(오른쪽). [사진 부산교통공사]

120년만에 철도 용어 15개를 우리말로 바꾸는데 성공한 부산교통공사 김상철 계획설계팀장(왼쪽)과 김철홍 대리(오른쪽). [사진 부산교통공사]

10개월의 노력 끝에 지난해 1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국어심의회에서 총 15개 용어를 바꾸기로 확정했다. 국토교통부는 국어심의회 의결사항을 지난 1월부터 재검토했고, 규제심사와 국무조정실 확인을 거쳐 27일 철도 전문용어 표준화 행정규칙을 고시했다.

김 팀장은 “아직도 바꿔야 할 용어가 수백 개가 넘는다”며 “첫 선례를 만들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앞으로는 훨씬 수월하지 않겠느냐. 앞으로는 후배들이 나서서 의미 있는 일들을 계속해줬으면 좋겠다”며 활짝 웃었다.

부산=이은지 기자 lee.eunji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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