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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정유 北 보낸 정부…국내 의결절차도 생략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정부가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개소를 위해 석유·경유 약 80t을 북한으로 반출하는 과정에서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교추협)의 사전 의결도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 방위성이 지난달 4일 동중국해 해상에서 북한 선적 유조선과 선적을 알 수 없는 선박이 환적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장면을 포착했다며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관련 사진 [연합뉴스]

일본 방위성이 지난달 4일 동중국해 해상에서 북한 선적 유조선과 선적을 알 수 없는 선박이 환적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장면을 포착했다며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관련 사진 [연합뉴스]

의결도 전에 공사부터 시작...비용도 '사후 산출'

남북협력기금에 대한 심의·의결권을 갖고 있는 교추협이 이산가족 시설 보수 및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개·보수를 위한 비용 32억 2000만원 집행을 의결한 것은 7월 17일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미 7월 2일 개성 연락사무소 개·보수 공사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금수품목으로 지정한 석유와 경유 8만 2918kg과 발전기(4만 9445kg)가 북한에 들어갔다. 대부분이 개성 연락사무소 공사용이었다.

교추협 회의에서도 정확한 비용 추계가 된 게 아니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간사인 정양석 자유한국당 의원실이 교추협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당시 회의에서 “추후 검증 등을 통해 최종 공사비를 산출·결정한다”며 32억 2000만원 지출을 의결했다. 정양석 의원은 “공사비도 다 외상으로 했고, 인원이 많이 들어갔는데 인건비도 얼마인지 두루뭉술하게 돼 있다. 거의 백지수표에 대한 의결이나 다름 없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통일부 당국자는 "사업비부터 확정한 뒤 기금 지원을 의결하는 것이 통상적인 절차이지만, 남북협력기금 운용관리규정 제5조(지원절차) 제6항은 사업의 성격, 긴급성 등을 감안했을 때 필요한 경우에는 이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해당 조항을 근거로 개성 연락사무소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개성 연락사무소 개소가 제재 위반 소지가 있는지에 대한 정부 입장 자체도 바뀌었다. 지난 2일만 해도 통일부 당국자는 “예외 인정 문제와 관련해서 계속 협의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청와대가 이는 제재 대상이 아니라고 밝히면서(20일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 정부는 “북측에 있는 우리 인원이 쓰는 것이라 제재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논리를 개발했다.

하지만 북한과 연결되는 행위가 제재 위반인지를 판단하는 권한은 안보리에 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우리 정부의 행보를 보면 미국이 남북관계 속도와 제재 위반 여부에 대해 우려하는 게 근거가 있어 보인다. 연락사무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북한이 비핵화 속도를 늦추려 하는 가운데 한국이 남북관계만 집중적으로 발전시키려고 하면 오히려 미국의 협상력을 낮출 수 있다”고 지적했다.

美, 눈에 불 켜고 ‘정유 위반’ 제재

개성용 정유 공급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대북 정유제품 공급 금지가 대북 제재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네 차례에 걸쳐 안보리 결의를 채택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부분이 북한으로의 원유와 정유 반입을 얼마나 제한하느냐였다. 안보리는 지난해 12월 채택된 결의 2397호에서는 정유 제품의 대북 반입을 금지했고, 민생 목적 등에 한해서만 연간 50만 배럴까지 반입할 수 있는 것으로 상한선을 정했다.

미국은 지난달 안보리 대북제재위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북한이 불법적으로 50만 배럴 이상의 정유제품을 거래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올 5월까지 89차례에 걸쳐 해상에서 불법적인 선박 간 정유제품 거래가 일어났고, 중국과 러시아 선박이 이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고 비판했다.

미 재무부는 21일(현지시간) 독자제재를 발표하고 북한의 불법 정유제품 거래에 연루된 러시아 해운사 등 기업 2곳과 선박 6척을 제재 명단에 추가했다. 미국의 독자제재 발표는 이 달 들어 벌써 세번째다.

외교 소식통은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과의 핵협상 원칙과 기준에서 오락가락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단 한가지 변하지 않는 원칙은 제재를 끝까지 유지한다는 것”이라며 “미국은 제재 덕분에 북한이 대화 테이블에 나온 것이고, 엄격한 제재 이행이 곧 협상력이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 금수품목 165건 북에 반출

북한으로 넘어간 금수품목은 정유와 발전기뿐만이 아니다. 정양석 의원은 6~7월 사이 안보리 결의 2397호에서 대북 판매·공급·이전을 금지한 60개 품목, 165건이 북한으로 반출됐다고 밝혔다. 반출 중량은 31만 4840kg, 금액으로는 532만 4000달러 상당이다. 건설에 필요한 각종 자재에 귀금속까지 포함돼 있다.

남궁영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북한에 대한 제재가 효과를 보려면 모든 국제사회 주체들이 협력해야 한다. 이번 개성 연락사무소와 관련, 미국과 협의가 충분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이라면 겉으로는 크게 불거지지 않더라도 속으로는 한·미 간 신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유지혜·권유진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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