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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젠더정치 시대의 개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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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7호 34면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가뜩이나 폭염 중, 여성들을 더욱 ‘빡치게’ 했다. 남혐 커뮤니티 워마드 운영자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고, 워마드에 남성 모델 누드 사진을 올린 여성에겐 실형이 선고됐다. 이례적인 고강도 수사, 엄중 처벌. 법 집행에 문제는 전혀 없지만, 수년간 끔찍한 여혐과 여성대상 몰카범죄 피해를 수수방관해 여성들의 원성을 샀던 당국이, 드디어 불법촬영물 집중단속에 나서 워마드부터 잡고 본 꼴이라 여론이 들끓었다.

워마드 실형, 안희정 무죄 판결 후폭풍 #들끓는 여성들, 한국 정치 지형 바꿀까

위계에 의한 간음 혐의를 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도 “위력은 있지만 위력을 행사한 증거가 없다”며 1심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위력이라는 것이 적극적으로 힘을 행사하지 않아도 높은 지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저절로 발휘되는 것인데, 이를 협소하게 적용했다. 여성계에선 시계 바늘을 뒤로 돌린 판결이란 비판이 나왔다. 재판부는 현행법의 한계도 토로했으나, 재판 결과엔 법조계 안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그리고 광복절 광화문에서 열린 보수단체 집회에는 워마드 회원 50~60명이 참석해, ‘안희정 유죄’ ‘문재인 퇴진’을 외치는 기이한 장면이 연출됐다. 김어준 같은 이는, 이들을 여성주의자들이 결별해야 할 ‘극우 페미니스트’라 규정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장덕진 교수는 최근 우리 정치의 주요 변수로 ‘젠더’가 등장하는 데 주목한다. 한국 정치의 최대 변수이던 지역과 이념, 그리고 세대에 이어 최근 젊은층을 중심으로 정치적 견해에서 젠더 차이가 두드러지는 ‘젠더 정치’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중앙대 이나영 교수는 특히 20대 여성과 50대 586 남성 간의 격차가 크다고 지적한다. 586이라면 문재인 정부의 핵심층이다. ‘이니 돌풍’ 아이돌급 팬덤의 핵심은 30~40대 여성, 지금 ‘문재인 재기해(자살해, 보다 정확히는 정신 차려)’를 외치는 것은 20대 여성이다.

최영미 시인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80년대 후반 운동단체 안에서 동료에게 성추행 피해를 입은 사실을 털어놨다. “운동을 계속하려면 이보다 더한 일도 참아야 한다”던 당시 여자 선배의 말도 기억했다. 그땐 비일비재했던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안희정 무죄 판결로 미투 운동이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그건 미투의 의미를 좁게 이해한 결과다. 미투는 많은 여성들에게 자기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제 경험을 언어화하며 권력의 문제로 바라보게 했다. 미투 운동의 ‘말하기 효과’다. 게다가 이미 길거리로 뛰쳐나온 젊은 페미니스트들은, 나 같은 나이 든 페미니스트들은 상상 못 할 정도로, 저만큼 달라져 있고 말이다.

물론 여혐·남혐 성대결 양상이 어지러운 현 상황이 우려되는 것은 맞다. 한국 정치사에 없던, 태극기와 워마드의 기막힌 ‘분노 동맹’을 어찌 봐야 할지 난감하기도 하다. 그러나 젊은 최영미의 발목을 잡던 그런 시절은 확실히 막을 내렸고, 지금껏 ‘민주화 먼저’ ‘민족문제 다음에’ 등으로 사회의 핵심 의제 뒤로 밀려왔던 ‘여성(젠더)이슈’가 정치 지형을 가르는 주요 변수로 떠오른 것만은 분명하다.

장덕진 교수를 좀 더 인용하면, “우리보다 앞서 정치적 젠더 갭을 경험했던 외국을 보면, 전통적으로는 여성이 남성보다 보수적이지만, 경제성장의 일정 단계에 이르면 젠더 간 정치적 견해차가 없어지고, 그를 지나면 여성이 남성보다 진보적으로 변하는 ‘재정렬(realignment)’이 이루어진다. 같은 시기에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임신과 출산에 대한 자기결정권, 유리천장의 완전한 해체 요구가 나타난다.” 지금 딱 우리 얘기다. 그는 또 “한국만이 세계사의 유일한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한국 정치의 (지형을 가르는) 균열구조를 영원히 바꾸어놓을 것”이라고 썼다.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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