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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나 베토벤보다 에어컨에 팥빙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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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호 27면

 WITH 樂: 윤종신의 ‘팥빙수’

윤종신의 9집 앨범 ‘그늘’. 제목처럼 시원한 그늘 아래 휴식 같은 느낌의 곡들로 채워져 있다.

윤종신의 9집 앨범 ‘그늘’. 제목처럼 시원한 그늘 아래 휴식 같은 느낌의 곡들로 채워져 있다.

바흐 이전에 에어컨이다. 최초로 에어컨을 만든 이에게 노벨상이라도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검색을 해봤다. “바흐 이전에 에어컨”이라고 호기롭게 말했으니 그 정도 지식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음악의 아버지만큼은 아니어도 꽤 친숙한 이름이었다. 윌리엄 캐리어. 그는 1902년에 습기 조절 장치를 개발한 후 회사를 창업했다. 그리고 이를 응용하여 지금 우리가 쓰는 현대식 에어컨을 만들었다.

여름에는 에어컨이 없으면 바흐도 베토벤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 경우에는 그렇다. 유명 연주자가 저렴한 티켓으로 유혹한다고 해도 선뜻 움직일 것 같지 않다. 예를 들어 “공연 50% 할인합니다. 단 공연장에 에어컨이 없으니 땀을 1.5리터쯤 흘릴 각오는 하시고, 높아진 불쾌지수로 이웃 관객과 다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별로 도전하고 싶지 않다. 등줄기로 흐르는 땀을 참으면서 바흐를 들을 수 있는 팬이라면 진정 존경할 만하다. 바흐나 베토벤은 날씨가 좀 더 시원해질 때까지 우리를 기다려 줄 만큼 시간도 많다. 대주교나 의뢰인의 요청으로 새로운 곡을 작곡하느라 바빠질 리도 없지 않은가.

에어컨 아래선 팥빙수다. 윤종신의 여름 노래 ‘팥빙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노래가 언제 나왔나 살펴보니 무려 17년 전이다. 9집 앨범 ‘그늘’에 수록됐는데, 실제 대중의 관심을 끈 건 2007년 디지털 싱글이 발매되면서부터다.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는 한마디로 한심했다. ‘어디서 애들 장난 같은 노래를 ’. 팥빙수 제조법을 옮겨놓은 것 같은 가사와 동요 같은 창법, 그리고 뽕짝거리는 편곡이 수준 이하로 들렸다. 1990년대 ‘너의 결혼식’ ‘오래 전 그날’ 같은 눈물 쏙 빼는 발라드로 청년들의 심장에 붉은 낙인을 찍던 윤종신이 이제 갈 데까지 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몇 번 듣다보니 이 유치한 노래에 은근한 중독성이 있었다. 최근에는 곡 후반부 브라스 편곡이 꽤 근사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팥 넣고 푹 끓인다 / 설탕은 은근한 불 / 서서히 졸인다 졸인다 / 빙수용 위생 얼음 / 냉동실 안에 꽁꽁 / 단단히 얼린다 얼린다.” ‘팥빙수’ 도입부다. 고교 때 배운 시조의 기본 운율 3·4조가 기억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랑 같은 운율이라 떡고물처럼 입 착착 달라붙는다. 그래서 인정하기로 했다. 윤종신은 천재다.

가사 중 좋아하는 부분은 “팥빙수 팥빙수 난 좋아 열라 좋아 / 팥빙수 팥빙수 여름엔 와따야”하는 부분이다. 비속어가 두 단어 들어 있어서 한동안 방송심의에 걸렸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뜻인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하는 단어들은 아니다. 하지만 시대와 함께 살아가는 대중가요에 너무 딱딱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좀 그렇다. 2000년대 초반에 나온 가사니까 “와따야”라 했겠지만 요즘 같으면 “네가 대박”정도로 바뀌지 않았을까? 물론 교육적으로는 “네가 최고” 정도의 타협점이 있겠다. 그런데 이렇게 바꾸고 나니 왠지 녹아서 철퍽거리는 팥빙수 같지 않나.

이제 음악이 아니라 진짜 팥빙수 이야기로 끝을 내겠다. 가사에 “프루츠 칵테일의 / 국물은 따라 내고 / 과일만 건진다 건진다”라는 부분이 있다. 나는 이런 팥빙수에 동의할 수 없다. 최고의 팥빙수는 국산 팥만 들어간 게 으뜸이다. 인절미 가루를 넣은 것 까지는 용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논쟁적인 주제 하나 더. 팥빙수는 섞어 먹는 것인가, 섞지 않고 먹는 것인가? 나는 섞지 않는 것이 좋다. CD 석 장을 걸고 맹세컨대 이게 분명히 낫다. 하지만 교양인답게 타인의 취향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이번 주말에는 팥빙수 섞어먹기에 도전해보겠다. 결과는 다음 기회에.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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