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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편집국장레터]큰 정부가 좋습니까, 작은 정부가 좋습니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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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4호 면

실리콘밸리의 IT회사를 방문하면 놀라는 게 있습니다. 미슐랭가이드 부럽잖은 구내식당의 음식들입니다. 게다가 대부분 무료입니다. 구내식당이 부러워 입사하고 싶어질 정돕니다. 하지만 요즘 샌프란시스코 시 당국이 IT회사들의 무료 구내식당과 전쟁을 선포해 지역 여론이 시끄럽다고 합니다. 구내식당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구 시가지의 음식점들이 고사당하고 있다며 무료 구내식당 금지 조례를 발의한 겁니다.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IT회사 직원들의 복지를 금지시키려는 겁니다. 과연 샌프란시스코 시 당국의 조치는 옳은 건가요? 옳지않은 건가요?

VIP독자여러분, 중앙SUNDAY 편집국장 박승희입니다. '뉴욕타임스 8월2일 기사' 로 레터를 시작합니다. 이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읽던 중 이런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큰 정부는 선인가(Big government is good?)’.

샌프란시스코 시의 무료 구내식당 금지 조치를 보도한 뉴욕타임스 기사

샌프란시스코 시의 무료 구내식당 금지 조치를 보도한 뉴욕타임스 기사

큰 정부, 작은 정부론의 역사는 깊습니다. 미국의 경우 1930년대 대공황을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 지출로 극복한 이후 케인지언들을 중심으로 ‘큰 정부론’을 주장합니다. 반면 신자유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정부의 개입은 최소한으로 물러나고 시장을 중심으로 민간의 활력을 높이는 ‘작은 정부론’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래서 미국 정치에서 공화당은 작은 정부를, 민주당은 큰 정부를 표방하곤 했습니다. 반면 한국 정치엔 이런 철학적ㆍ이념적 배경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보수성향의 박근혜 정부가 복지 공약을 내세워 집권하는가 하면, 이명박 정부는 4대강과 대운하로 대표되는 큰 정부의 재정 정책을 앞세웠습니다. 뭉뚱그리자면 한국의 정치는 누가 그때그때 시대에 맞는 포퓰리즘을 내세우느냐의 수준 낮은 논쟁이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왼쪽 두 번째)이 7월 5일 서울시 구로구의 한 행복주택 아파트 광장 놀이터에서 열린 신혼부부 및 청년 주거대책 발표 행사에서 박수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왼쪽 두 번째)이 7월 5일 서울시 구로구의 한 행복주택 아파트 광장 놀이터에서 열린 신혼부부 및 청년 주거대책 발표 행사에서 박수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정부 들어와 큰 정부론에 대한 찬반 논쟁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지난 1년 2개월간만 놓고보면 역대 어느 정부보다 정부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어서입니다. 지난 달만 해도 신혼부부 88만 가구, 청년 75만 가구 주거대책을 정부가 발표했습니다. 정부가 복지를 책임져주고, 시장의 불균형을 개선해 준다면 그 자체가 ‘선(善)’입니다. 하지만 큰 정부론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돈, 즉 재원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앞서의 주거대책을 발표하면서 "이번 대책에 투입되는 재정규모가 지난 정부에 비해 3배에 달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부의 재원은 세금입니다. 큰 정부론에 대개 증세가 뒤따르는 이유입니다. 문제는 증세정책이 본래 표를 좇아야하는 정치인들의 포퓰리즘과 맞지않는다는 겁니다. 결국 큰 정부론을 부르짖는 정부는 사회적 반발이 덜할 부자나 대기업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둬 재정 지출에 활용하는 정책을 앞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갑을 논쟁이 치열해지고, 대기업을 옥죄는 정책이 등장하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큰 정부론에는 또 정부는 선(善)이라는 대담한 도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보았듯이 정부가 늘 선하진 않았습니다.

민생현장 찾아 나선 김병준 비대위원장   (서울=연합뉴스)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이 1일 오전 서울 시내 시장을 방문하고 버스, 택시 등을 타며 민생현장을 찾아 시민들과 얘기를 나눴다. 사진은 김 비대위원장이 이날 택시를 타고 이동하며 택시기사와 얘기하는 모습. 2018.8.1 [자유한국당 제공]   photo@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민생현장 찾아 나선 김병준 비대위원장 (서울=연합뉴스)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이 1일 오전 서울 시내 시장을 방문하고 버스, 택시 등을 타며 민생현장을 찾아 시민들과 얘기를 나눴다. 사진은 김 비대위원장이 이날 택시를 타고 이동하며 택시기사와 얘기하는 모습. 2018.8.1 [자유한국당 제공] photo@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은 요즘 가는 곳마다 “이제는 국가주의가 아니라 자율주의가 필요하다. 새로운 모델의 중심에는 시장과 공동체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국가주의라는 다른 말로 포장했지만 문재인 정부의 큰 정부론을 비판한 겁니다. 특히 국가주의 앞에 ‘박정희식’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문재인의 큰 정부론 = 박정희 식 국가주의’라는 등식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측에서 써왔던 프레임 정치를 차용했다는 점에서 논쟁의 확산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같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 당국이 IT회사들의 구내식당을 겨냥해 취한 조치는 큰 정부론의 작은 예입니다. 그래서 이 논쟁이 불러올 파장은 정치적이고 이념적입니다. 당연히 정답은 없습니다. 누가 더 많이 지지하느냐의 논쟁입니다.
중요한 건 이런 논쟁이 한국 정치에서 이뤄지는 게 나쁘지 않다는 점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빨갱이”, “박근혜 정부는 적폐”라는 편 가르기보다 훨씬 생산적입니다. 정치시장의 유권자들이 큰 정부론에는 증세라는 함정, 작은 정부론에는 분배의 약점이 있음을 인식한다는 건 중요합니다. 정치인들에게 속지않을 수 있어서입니다. 지역주의에 휩쓸려 정치인들을 선택하고, 색깔론에 치우쳐 표를 찍는 것보다 훨씬 선진적입니다. 오늘 당신은 어느 편입니까.

중앙SUNDAY는 이번주 원격진료를 스페셜리포트로 준비했습니다. 정보화 기술의 발달로 산간 오지의 환자를 서울의 의사가 진료할 수 있게 하자는 게 원격진료 논의의 출발입니다. 하지만 이익단체 등의 반대로 20년째 시범사업만 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미국이나 일본, 중국의 의료업체들은 저만치 앞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유시민 복지장관이 의료민영화를 추진할테니 야당인 한나라당이 도와달라고 한 일이 있다”는 진수희 전 복지부장관의 인터뷰도 담았습니다.
날씨가 너무 덥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부른 자연의 재앙이라선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더 열악한 사람들을 배려한다면 우리가 느낄 폭염의 몫은 조금 덜하지 않을까요.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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