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저녁시간 늘어” “칼퇴근 꿈도 못 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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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주 52시간 근무제를 시행한 지 약 한 달이 지난 지난달 31일 오후 6시쯤 대규모 사업장이 밀집한 서울 중구 청계천의 다리 위가 퇴근을 서두르는 직장인들로 분주한 모습이다. [연합뉴스]

주 52시간 근무제를 시행한 지 약 한 달이 지난 지난달 31일 오후 6시쯤 대규모 사업장이 밀집한 서울 중구 청계천의 다리 위가 퇴근을 서두르는 직장인들로 분주한 모습이다. [연합뉴스]

8년 차 금융회사 직원 장모(32)씨는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8시쯤 퇴근한다. 점심·저녁 시간 2시간을 제외해도 하루 10시간 근무다. 때때로 더 늦게 끝나기도 하니 주 52시간을 넘기기 일쑤다. 장씨는 “오후 4시까지 창구 업무를 병행하고 그 이후에야 밀린 업무를 제대로 할 수 있다. 저녁 먹고 일하는 직원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주 52시간을 넘어도 아직 처벌받지 않는 유예기간이라 그런지 회사서도 별다른 지침이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주 52시간 한 달, 업종 따라 희비교차 #회사 주변 식당은 회식 줄어 타격 #단속 유예로 10시간 근무도 여전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 한 달을 맞으면서 업종과 업태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여전히 초과근로가 만연한 곳도 있는가 하면 잘 지키는 곳도 있다. 빠른 퇴근으로 회식이 줄어들면서 도심의 식당과 고깃집들은 고민이 깊어졌다.

영업직들은 근로시간 축소의 체감도가 특히 낮다. 서울의 한 영업소에서 보험설계사를 관리하는 지점장 김모(32)씨에겐 저녁식사도 ‘업무의 연속’이다. 김씨는 “월 5만원 계약건이라도 고객이나 보험설계사가 내가 오길 바라면 무조건 간다”며 “계약을 한 건, 한 건 올리는 게 영업소 평가로 직결되는데 주 52시간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일하겠냐”고 말했다.

건설업체에 다니는 직장인 박모(35)씨는 “이틀 전에 회사에서 ‘업무용 컴퓨터를 근무 시간 외에 사용하면 모두 연장 근무로 처리하겠다’는 공지를 올렸다”며 “일부 상사들이 업무를 시켜놓고 컴퓨터를 ‘사적 사용’한 것으로 처리하라는 지시를 하는 사례가 다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현장에서는 오전·오후 휴식시간을 30분씩 편성해 퇴근이 늦어졌지만 실제로 휴식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털어놨다.

물론 주 52시간 근무에 만족하는 목소리도 있다. 전자 분야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홍모(34)씨는 “야근·특근이 없어져 월급이 줄었지만, 퇴근시간이 오후 11시~자정에서 오후 7시로 짧아져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그의 회사는 퇴근시간이면 사무실 불이 꺼진다. 중견 건설관련 업체에 다니는 황모(32)씨는 “회사에서 시스템을 바꿔 근로시간을 넘지 않도록 관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며 “근무시간이 넘어설 것으로 보이는 직원에게는 강제로라도 대체 휴무를 주는 등 긍정적인 변화가 있다”고 말했다.

‘칼퇴’가 전보다 늘어나면서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식당들은 울상이다. 서울 종로5가에서 30석 규모의 식당을 하는 변도윤(52)씨는 “저녁 시간에 식당을 찾는 직장인이 줄면서 지난달 매출이 전달 대비 20% 정도 감소했다”며 “원래 오후 9시까지는 문을 열었는데 지금은 이보다 일찍 문 닫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서울 종각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서모씨는 “평일 하루 매출이 150만~200만원 수준이었는데 요즘은 80만원 수준”이라며 “월세 내고 직원 월급 주면 남는 게 없어 가게를 접을까 고민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지방에서는 근로시간 단축에 따라 버스운전사가 귀해졌다. 전남도는 고용노동부 목포지청과 함께 버스운전사 125명을 확충하기 위한 교육에 나섰다. 1종 대형면허 취득자에 한해 버스운전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교육을 해주고 있다. 이들이 교육을 마치면 순천에 50명, 광양과 나주에 각 20명, 목포에 35명을 버스운전사로 채용할 예정이다. 2021년까지 버스운전사 1039명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게 전남도의 추산이다.

산업 시설이 모여 있는 울산 기업체들은 “사무직·생산직 모두 ‘주 52시간’을 비교적 잘 지키고 있다”면서도 “시운전·정기보수 기간의 근로시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울산상공회의소는 지난 5월 청와대와 국무조정실 등에 탄력적 근로 시간제 단위 기간 확대 등을 건의했다. 단위 기간을 6개월이나 1년으로 늘려 성수기와 일감이 적은 비성수기에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얘기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 처벌 유예기간이라는 점과 뿌리 깊은 한국의 장시간 노동 문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혼란이 벌어지고 있다”며 “재량근무나 추가 인력 배치 등을 노사가 함께 고민해 기존 기업 문화와 업무 관행을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한대·오원석 기자, 울산·무안=최은경·김호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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