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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52시간 근무, 일본이었다면 가능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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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1 “일하는데 답을 못한 건 당연하지”

일본인 지인에게 카톡이나 문자메시지를 보내면 곧바로 답이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근무시간 중 개인적 연락이나 잡담은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답을 받으려면 카톡을 보내놓고 차라리 잊어버리는 게 더 속이 편하다. 일본인 중엔 오히려 근무 도중 친구나 가족들과 언제든 카톡으로 대화하고 인터넷 서핑도 하는 한국인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많다.

아예 휴대전화를 개인용과 업무용으로 분리해 2대씩 들고다니는 직장인도 적지 않다. 노트북도 마찬가지. 업무용 노트북엔 개인 파일을 저장해 두지도 않는다. 노트북을 집에 가져가지 않는 것은 기본이다. 퇴근 후에도 직장 상사의 업무 카톡을 받는 한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일과 개인 영역의 철저한 분리다.

#2 “암호표가 따로 없네”

방송국에서 일하는 한 지인이 보여준 근무표를 보고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시프트’라고 부르는 근무표엔 40여 명 팀원의 출근일자와 시간 등이 엑셀 표로 정리돼 있었다. 오전 출근자, 오후 출근자, 단시간 근무자가 알록달록 색깔별로 표시돼 있고, 연월차 휴가자, 대체휴가자 표시가 마치 난수표처럼 적혀 있었다.

B4 크기의 종이를 꼬깃꼬깃 접어 수첩에 넣고 다니는 그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보다 매달 근무표를 짜는 게 더 어렵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도 “내가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이다. 제한된 근무시간 내에서 팀원들이 효율적으로 일하려면 복잡하지만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천편일률적으로 출근해 언제 퇴근할 수 있을지는 퇴근 직전에야 알 수 있는 한국의 직장 풍경과는 180도 달랐다.

#3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서 일본의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연간 1713시간으로 한국보다 356시간 적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한국 못지않은 ‘과로 사회’로 유명하다. 이런 오명을 씻어내기 위해 최근엔 추가 근무시간 상한을 월 45시간, 연간 360시간으로 제한하는 ‘일하는 방식 개혁’ 법안을 통과시켰다.

얼마 전 한국에 들렀더니 온통 화제가 ‘주 52시간 근무제’였다. 지금껏 해 본 적 없는 근무형태를 적용하느라 곳곳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덜그럭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일본에서라면 어땠을까. 최소한 일과 개인 영역의 철저한 분리, 유연한 근무시간 조정 이 두 가지 면에서 분명 한국보다 나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근무시간 단축은 제도의 변화는 물론 의식의 변화도 함께 따라줘야 한다. ‘주 52시간 근무제’에 안착할 수 있는 힌트를 일본의 사례에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윤설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