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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권의 ‘잿빛 민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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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심재우
심재우 기자 중앙일보 뉴욕특파원
심재우 뉴욕특파원

심재우 뉴욕특파원

브라질 출신의 소년 디에고 마갈리에스(10). 지난 5월 말 부모와 함께 멕시코를 거쳐 미국 국경을 넘다가 국경순찰대에 붙잡혔다. 트럼프 행정부의 방침대로 부모와 격리된 디에고는 아동보호시설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 공항에 내렸다. 셔츠와 반바지 2개, 운동화, 위생용품을 받아들었다.

오전 6시30분이면 기상하고, 낮시간엔 주로 화장실 청소를 했다. 과테말라 출신의 아도니아가 울면서 보채면 보호시설 직원이 강제로 주사를 맞혀 잠을 재웠다. 지난달 말 시카고의 연방법원 판사가 디에고가 가족과 재회하도록 명령했다.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만 하고 포옹은 하지 못했다. 보건상의 이유로 서로 간의 신체 접촉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생명이 최우선의 가치인 미국에서 최근 벌어진 ‘잿빛 민낯’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불법 이민자에 대한 무관용 정책에 따라 5월 초부터 지난달까지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 붙잡은 2400여 명의 미성년자를 부모로부터 떼어내 ‘생이별’을 경험시켰다.

인륜을 거스르는 야만스러운 법 집행에 대해 인권운동가를 비롯한 수많은 미국인이 항의한 결과 부모-아동 격리 지침은 철회된 상태다. 5세 이하 어린이부터 차근차근 부모와 재상봉이 이뤄졌다. 이후 아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보호시설에서 당한 비인간적인 처우가 미국 언론을 통해 생생하게 고발되고 있다.

‘음식을 나눠 먹지 마라’ ‘별명을 사용하지 마라’ ‘최대한 울지 않는 것이 이롭다’는 경고 문구가 보호시설 곳곳에 붙어 있었다. 기상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화장실이나 식당을 갈 때는 7명씩 조를 짜서 줄을 지어 이동해야 했다. 죄수가 수감된 감옥과 별 차이가 없다.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기 싫으면 국경을 넘지 마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뻔뻔한 대응에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질 정도다.

부모·자식 간에 생이별을 요구하는 만행으로 치자면 북한을 빼놓을 수 없다. 북한 외교관이 해외 근무지로 발령받고 나갈 때 자식이 둘일 경우 그중 한 명은 북한에 두고 가야 한다. 서방세계로의 탈출을 막기 위한 일종의 ‘인질’인 셈이다.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로 근무하다 남한으로 귀순한 태영호씨도 가족과 헤어져야 하는 아픔을 겪기 싫어 결단을 내렸다고 자신의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자세하게 밝혔다. 특권층에 속하는 외교관 가족에게도 이 정도인데, 일반 평민 이하의 인권 유린은 불문가지의 수준이다.

북한 인권 문제는 현재 비핵화에 가려 있지만 언젠가 부각될 수밖에 없는 이슈다. 불법이민자 가족의 인권을 깔아뭉개는 트럼프 행정부가 과연 북한의 인권을 진정으로 문제 삼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심재우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