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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 합법 → 불법 … 정부가 방조한 한국GM 비정규직 사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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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한국GM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난 9일 한국GM 부평공장 본관 3층 사장실을 점거한 채 정규직 전환 등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GM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난 9일 한국GM 부평공장 본관 3층 사장실을 점거한 채 정규직 전환 등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GM이 경영 정상화에 돌입하자마자 또 악재에 부딪쳤다. 고용노동부의 ‘오락가락 지휘감독’이 이번 사태의 근본적 배경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비정규직, 한국GM 사장실 점거 #근무 시스템, 관련법 변화 없는데 #정권 코드 따라 근로감독 결과 달라 #자동차 공정 특성상 작업 환경 얽혀 #근로자 ‘신분’ 명확히 규정 어려워 #비정규직 직접 고용 놓고 노사 대립 #회사, 정규직 추가 채용 가능성 우려

민주노총 한국GM 군산·부평·창원 비정규직지회는 9일부터 카허 카젬 한국GM 사장실 점거를 시작했다. 이들은 비정규직 직접고용과 해고한 비정규직 근로자 복직을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진행 중이다.

한국GM 부평비정규직지회는 10일 현재 “카허 카젬 사장이 직접 교섭하면 사장실 점거를 해산하겠다”는 입장이지만, 한국GM은 “한국GM 근로자가 아닌 협력사 근로자와 한국GM 사장이 직접 대화할 이유는 없다”며 맞서고 있다.

한국GM이 또 이런 사태에 휘말린 건 한국GM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신분을 두고 의견이 분분해서다. 자동차 공장에서는 수많은 하청업체 근로자가 근무한다. 자동차 제조사는 장기간 숙련이 필요한 공정에 정규직 근로자를 투입하고, 단순 조립 공정은 외주를 맡기는 경우가 많다.

이때 외주 공정을 하청업체 공장에서 하청업체 근로자가 만들면 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자동차 공정의 특성상 일부 공정이 반드시 완성차 공장 내부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예컨대 도장작업이 끝나면 차체에서 문짝을 잠깐 뗐다가 유리창·스위치 등을 붙이고 나서 다시 문짝을 붙인다. 이때 개당 300kg이 넘는 차체를 하청근로자가 일하는 외주 공장으로 옮겼다가 완성차 공장으로 되가져오는 건 비효율적이다. 하청근로자가 완성차 공장에 들어와서 일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완성차 공장에서 일하는 하청업체 근로자 신분이 논란이다.

한국GM 사장실 점거 사태의 발단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GM은 정규직 원청근로자와 비정규직 하청근로자가 동일한 생산라인에서 거의 동일한 조립 업무를 수행했다. 쉽게 말해서 오른쪽 바퀴는 정규직이, 왼쪽 바퀴는 비정규직이 만드는 식이었다. 이를 두고 고용노동부는 2006년 관리감독을 실시해 한국GM을 불법파견으로 기소했다.

이후 한국GM은 고용노동부 감독결과를 이행해서 ‘공정블록화’ 작업을 진행했다. 외주에 맡기는 공정이 정규직 근로자 동선과 겹치지 않도록 컨베이어벨트부터 조립 프로세스까지 재배치했다. 파견근로법 규정에 따라 독립적인 장소에서 지휘감독권을 행사하지 않는 일부 조립공정만 외주를 맡겼다.

한국GM의 이런 공정블록화 작업은 2012년 고용노동부로부터 공식적으로 ‘훌륭하다’는 인정을 받는다.

고용노동부는 2013년 다시 점검에 나선다. 당시 근로감독을 실시한 감독팀장은 10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하청근로자가 일하는 사업장도 분리돼 있었고, 하청근로자 지휘·감독 정황도 없었다”며 “파견근로법상 불법파견은 판단기준이 명확하고 개인적으로도 판단 경험도 풍부한데, 한국GM은 불법 파견이 아니었다”고 잘라 말했다.

당시 관리감독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도 “한국GM을 불법파견으로 본다면 한국 자동차·자동차부품 산업 자체가 사실상 파견이 불가능하다”며 “명확한 법령에 근거해서 사심 없이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이랬던 고용노동부 입장이 180도 돌변한 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내세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다. 고용노동부는 5월 28일 “한국GM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한 결과, 한국GM 창원공장 하청근로자 774명의 근로형태는 불법파견”이라며 “이들을 전원 직접 고용하라”고 판정했다.

문제는 2013년과 지금의 한국GM의 하청 근무 시스템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점이다. 또 적법성을 판단하는 파견근로법과 운영지침도 거의 바뀐 게 없다. 모든 상황이 그대로인데, ‘합법’이라던 시스템을 갑자기 ‘불법’으로 본 것이다.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는 “현재 수사 중인 사안은 판단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며 “수사 종료 이후 불법파견의 근로를 밝히겠다”는 입장이다.

이로써 구조조정을 통해 회생의 실마리를 잡았던 한국GM은 또다시 비용 부담을 떠안게 됐다. 고용노동부 이번 판단은 창원공장 하청근로자만 대상이다. 고용노동부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면 부평·창원공장 비정규직 근로자까지 한국GM은 1900명의 정규직을 별도로 채용해야 한다.

한국GM은 4개월 동안 온갖 진통을 겪으며 1·2차에 걸쳐서 총 2700명이 희망퇴직했다. 고용노동부 판단에 따르면 그간의 진통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다. 퇴직 인원의 70%가 다시 정규직으로 근무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이 와도 생산 현장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도 문제다. 한국GM이 군산공장 생산라인을 이미 폐쇄했기 때문이다. 한국GM은 “군산공장 근로자를 빼면 희망퇴직자의 대부분은 사무직 근로자”라며 “생산직에는 결원이 사실상 없다”고 말했다.

기존 정규직과 형평성도 문제다. 군산공장 근로자 중 600여 명은 희망퇴직을 신청하지 않고 부평·창원공장 전환배치를 원했다. 하지만 한국GM 노사는 당장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 중 200여 명만 전환배치 하는 데 합의했다. 만약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면 현재 무급휴직 중인 400여 명의 정규직 근로자가 불만을 가질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GM 비용구조가 또 다시 약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1인당 인건비(8700만원)를 기준으로, 당장 연간 1650만원 정도의 인건비 부담이 발생한다. 수익성 개선을 위해 추진했던 군산공장 폐쇄도 무의미해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배경이다.

박진서 한국경영자총협회 노동정책본부 법제팀장은 “한국 파견근로법이 지나치게 협소한 26개 업무에만 파견을 허용하고 있다는 것이 이번 한국GM 사장실 점거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며 “미국·독일처럼 포괄적으로 파견 대상 업무를 허용해야 불법파견 논란을 해소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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