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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없지만 음료수 마시며 "디스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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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서울 송파구 오금동 15만평 부지에 부챗살 모양으로 우뚝 솟은 올림픽선수촌은 「세계가 서울」이 되고 또 「서울이 세계」가 되는 벽이 없는 곳이다.
상주 인구만도 2만5천명 규모
세계 1백60개국으로부터 1백60개이상의 국적을 가진 1만4천여명의 올림픽참가 선수·임원들과 7천여명이 넘는 자원봉사자·운영요원들이 시한을 정해 놓고 한곳에 모여 사는 이곳은 말 그대로 지구특별시.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피부색·얼굴 생김, 또는 서로 다른 그들의 국적만큼이나 다채로운 나름대로의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그러나 지구특별시의 존재이유 자체가 올림픽인 만큼 이들에게 있어 오직 한가지 목표는 올림픽에서의 금메달이고 그것은 동시에 이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동아줄 같은 질긴 공봉점이라고 할 수 있다.
통칭 선수촌운영본부라 불리는 선수촌 행정기관은 실무를 전담하는 4개 차장제도를 갖추고있고 그 밑에 18개부가 편성되어 있다. 이와는 별도로 병원이 있고 선수촌 내의 움직임을 수시로 확인하고 기록하는 상황실과 파출소가 있다.
「선수촌 빌리저」라는 신문도 매일 발행되고 국가로 치면 사부 중에서 입법·사법부가 없는 반쪽 짜리 국가인 셈이다.
선수촌은 크게 숙소지역과 국제지역으로 나뉘어 진다.
행정을 위한 운영본부, 선수들의 편의위락시설은 모두 국제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국제지역을 제외한 숙소지역은 다른 어느 곳보다 일찍 불이 꺼지고 또 켜진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모든 시민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수회관이나 선수촌본부 건물 내에 위치한 각종 명칭을 갖고있는 사무실은 밤이 없다.
시시각각으로 34개 경기장에서 마무리된 각종 경기결과를 기록하고 취합해 전산처리 해야만 하는 경기안내센터가 하루 일과를 대충 끝내는 시간은 다음날 새벽 2시쯤.
바로 그 옆방에선 매일 오후 7시까지 접수된 1백60개국 23개종목 선수단들의 다음날 경기 및 연습일정을 종합해 연습장 별로·경기장 별로 시간을 배정하고 또 이들에게 제공할 차량을 조절하느라 밤을 하얗게 밝힐 수밖에 없다.
86개동 3천6백92가구에 거주하는 1만4천여명의 시민들이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토해내는 각종 민원사항들, 다시 말해 전구가 나갔다, 문이 뻐걱거린다, 심지어 화장지가 떨어진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불편사항은 24시간 내내 즉각적으로 검토되고 시정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운영본부요원들은 한시도 눈을 붙이기 어렵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곳은 선수촌 주방.
33일간의 선수촌 운영기간동안 무려 연인원 25만4천명에게 75만 끼를 제공해야하는 주방에는 조리팀 인원만도 5백62명이나 되는데 안내·구매요원까지 합치면 주방관계요원숫자만도 9백50여명에 달한다.
서울 인근에서 계약된 청정채소와 과일이 밤새 도착하기 때문에 이들 식재료가 지구특별시민의 아침식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메뉴는 총18항목에 2백66종. 수프만도 22종류나 되고 빵은 25종, 육류 및 생선류 60종, 치즈만도 15종에 이르는 등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선수촌 식탁이 밤과 새벽사이에 차려진다.
서울올림픽 선수촌식당 메뉴는 84LA대회(2백16종)는 물론이고 캘거리 동계올림픽 때의 2백55종을 숫자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경신한 명실상부한 사상 최대의 규모다.
주방에서 각종 음식재료 다듬기가 끝나 불 위에 올려질 때인 새벽 5시 반쯤이면 아파트 동과 동 사이는 새벽운동에 나서는 짧은 반바지차림의 선수들이 뒤로 남기는 경쾌한 발자국소리가 적막을 가른다.
길을 따라 뛰거나 걷는 선수들이 이곳저곳에서 모습을 나타내면 밤새 유난히 큰 소리로 실로폰 연주를 하던(?) 국기광장의 1백60개 깃봉들이 소리를 낮춘다.
입촌 국가들의 국기가 매달린 길다란 밧줄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쇠로 만들어진 깃봉을 때리는 소리가 마치 실로폰 연주처럼 들리는 것이다.
이들은 인조잔디가 깔린 국기광장에서 간단한 아침체조로 몸을 푼다.
몇몇 선수들은 국기광장과 큰길을 가로질러 올림픽공원으로 발길을 내닫기도 한다.
이때쯤이면 밤새 허술했을지도 모르는 선수촌 외곽을 검색하는 경비견과 안전요원들도 임무를 끝내고 자취를 감춘다.
몇몇 선수들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선수회관 뒤쪽에 위치한 서키트 트레이닝센터를 찾거나 실내수영장으로 직행, 좀더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하기도 한다.
아침운동을 끝낸 선수들이 샤워를 하고 있을 무렵이면 자원봉사자들의 출근시간.
이들은 매일아침 8시까지 출근해 팀별로 회의를 갖고 전날의 일과를 정리하고 또 운영본부 직원으로부터 그날그날 새로운 일정을 지시 받는다.
물론 아침식사를 거르고 곧바로 오전훈련을 떠나는 선수들도 있고 9시부터 시작되는 경기를 위해 7시쯤에 식사를 마치는 선수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수들은 오전 9시쯤 식사를 하게되고 이 시간 식당안팎은 온통 새로 인사를 나누랴, 음식을 고르랴 분주하기만 하다.
인사를 나누는 모습도 각양각색.
얼굴을 비벼 대기도하고 손바닥·주먹을 마주치는가 하면 손을 잡고 엄지손가락을 비비는 인사법도 있다.
그야말로 천태만상. 모든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지켜왔던 방식대로, 또 필요한대로 자신만의 세계를 유지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아침식사가 끝나는 오전 10시쯤이면 선수들은 대부분 숙소에 머무른다.
이 시간에 선수들은 숙소의 라운지에서 코치·감독들과 훈련일정을 상의하기도 하고 경기시간을 맞추기 위한 컨디션조절문제를 논의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임원들이 전날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수집해온 상대팀들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교환하기도 한다.
침대에 엎드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편지를 쓰는 선수들도 있다.
키가 큰 북구선수들, 특히 2m가 넘는 선수들에게는 기존침대가 작아 보조침대를 붙여놓고 사용하는데 이들이 침대에 엎드려 글을 쓸 때면 두발이 보조침대 밖으로 뻗어 나오는 우스꽝스런 모습인데도 웃기는 커녕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부지런한 선수들은 공동 세탁장에서 빨래를 하거나 다리미질을 한다.
그래서 숙소마다 베란다에는 각양각색의 빨래가 널려있다.
선수회관 앞 큰길가에는 각 경기장이나 연습장을 향해 떠나는 버스가 줄이어 서있다.
경기장에 나가는 선수들은 대부분 도시락을 지참, 낮 동안의 선수촌은 비교적 한산해진다.
경기나 훈련이 없는 선수라 해도 선수촌 병원의 안마실·물리치료실·수영장·사우나실에서 개별적으로 컨디션조절에 열중하는 까닭에 건물 밖은 트레이닝복차림에 경기용품이 든 커다란 가방을 둘러멘 채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 외엔 선수구경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점심시간의 선수촌식당은 금세 사람들로 그득해진다.
아침식사를 우유나 주스·샐러드 등으로 가볍게 하기 때문에 점심시간엔 선수들의 식욕이 왕성하다. 따라서 뷔페식인 선수들의 접시는 수북하게 마련.
이 시간이 비로 선수들에게는 부담이 없이 자유로운 시간인 탓인지 국제전화가 가능한 공중전화박스가 붐비고 은행·우체국·쇼핑센터가 북적거리고 미장원과 즉석사진현상소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기도 한다.
국기광장을 비롯, 선수회관 곳곳에서는 자국통역요원·운영요원들과 무료 제공되는 음료수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거나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이 시간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다. 각국선수단 임원들은 운영본부 곳곳을 찾아다니고, 또 각국 NOC사무실을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느라 발바닥에 불이 난다. 목에는 카메라를 걸고 필기구를 옆구리에 꼭 낀 채 반바지 또는 트레이닝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사뭇 전투적(?)인 걸음걸이로 빠르게 걷는 사람은 일단 정보수집중인 임원들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정도.
선수촌의 다운타운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수회관이 마치 이태원의 밤거리처럼 북적거리는 때는 저녁식사 이후인 8시쯤.
극장·탁구장·당구장·다방·전자오락실·전신전화국·은행 등에 선수들이 넘실거린다.
8시부터 문을 여는 디스코테크도 선수들에게는 인기가 있는 곳이다.
술은 없지만 음료수 잔을 높이 쳐들고 축하를 외치는 생일파티가 매일 밤 열린다.
그런가 하면 초반에 탈락, 서둘러 귀국 길에 오르게 된 선수들은 실컷 놀고 보자는 속셈으로 디스코테크가 문을 닫을 때까지 춤을 멈추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서로를 축하하거나 격려하는 경쾌한 함성들이 홀을 채운다.
저녁 8시. 일과를 마친 자원봉사요원들이 그 동안 사귄 친구들과 만나 함께 선수촌을 나서는 모습이 마치 도심의 출근시간 거리 풍경과 흡사하다.
그리고 밤 10시 다운타운은 간혹 눈에 띄는 선수들을 제외하면 자정을 넘긴 길거리처럼 한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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