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퍼 300만 그릇… 다일복지재단 무료급식 '빛나는 기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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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전 7시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밥퍼운동본부. 4평 남짓한 주방에서 '밥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밥사모) 회장 노화자(여.48)씨와 3명의 간사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미역을 다듬으며 1000인분의 식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2001년 결성된 '밥사모'는 매월 한 차례 밥퍼운동본부에 나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오늘 메뉴는 잡채, 쇠고기 미역국, 김치, 깻잎의 '1식 3찬'이다. 어디 내 놔도 손색없다. 밥퍼운동본부는 메뉴 선정 시 일주일에 육류 2회, 어류 2회, 기타 1회 제공을 원칙으로 한다. 김치와 쌀을 제외하고 나머지 음식 재료는 당일 새벽에 구입한다.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1998년부터 노숙인과 독거노인을 대상으로 점심을 대접해온 다일공동체의 '밥퍼나눔운동'이 27일 300만 그릇을 돌파한다. 25일 서울 청량리 밥퍼나눔운동본부에서 나눠주는 점심을 먹기 위해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김태성 기자

"거기, 권 기자. 일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장갑부터 끼고 이쪽으로 오세요." 잠시 한눈 판 사이 '군기반장' 유병옥(50)씨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곳곳에서 찾아오는 자원봉사자들에게 일을 배분하고, 소란을 피우는 노숙인을 통제하는 것이 그의 몫이다. 3년 전 이곳에 밥을 먹으러 왔다가 '밥값을 해야겠다'며 설거지를 도운 인연으로 '밥퍼 가족'이 된 그는 자신이 '거듭났다'고 말한다.

50인분 밥솥에 당근 채를 썰어 넣고 주걱을 이용해 볶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쇠고기.양파.부추 등을 차례로 넣었다. 화로의 열기로 옷이 젖기 시작했다. 음식 간을 보던 노 회장은 "여름철에는 내부 온도가 50도를 넘어선다"며 "지난해 SK마라톤 동호회에서 자원봉사 나왔다가 이를 보고 에어컨 한 대를 설치해 줬지만 역부족"이라고 말했다.

◆ 자원봉사의 힘=10시가 되자 삼성화재 직원, 휘경여고 학부모, 상일교회 교인 등 20명의 자원봉사자가 이곳을 찾았다. 앞치마를 두르자마자 군기반장의 배분에 따라 파 다듬기, 김치 옮기기, 배식 준비 등 맡은 일을 일사불란하게 해나갔다. 1000인분의 식사를 마련하려면 20명 이상의 일손이 필요하다. 이곳에 매일 나와 음식을 만드는 밥퍼 가족은 3명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자원봉사자의 몫이다. 2002년부터 현재까지 모두 3만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다녀갔다.

이즈음엔 이미 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몰려와 100m가량 줄을 서 있었다.

10시55분. 배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이미 100석의 자리를 가득 채운 무료 급식자들은 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당신의 얼굴을 보니 밥맛이 납니다"라고 인사한 뒤 식사를 시작했다. 이들은 대부분 노숙인과 70대 이상의 노인들이다. 서울 은평구에서 이곳을 찾은 김모(72)씨는 "거의 내가 막내 수준"이라며 "80, 90대 이상이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이들 가운데는 이곳에서 먹는 점심 한 끼가 하루 식사의 전부인 사람도 많다. 그래서 두 번, 세 번씩 밥을 추가로 먹고, 밥을 비닐봉지에 따로 싸 가기도 한다.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자원봉사자들은 주방에서 자리를 맞춰 선 채 각자 맡은 일감을 해냈다. 배식이 끝난 뒤 만든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이렇게 18년 동안 진행된 밥퍼운동은 27일 300만 번째 그릇의 주인공을 맞이하게 된다. 밥퍼운동을 주관하는 다일공동체는 다음달 2일 자원봉사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300만 그릇 돌파를 기념하는 '감사와 축하의 잔치'를 개최할 예정이다.

◆ 밥퍼운동은=1988년 다일복지재단의 최일도 목사가 처음 시작했다. 청량리역 광장을 지나가던 그에게 어느 날 한 노숙인이 다가와 "라면 한 그릇을 끓여 달라"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준비하던 유학을 포기하고 노숙인 무료 급식 운동을 시작했다. 최 목사는 다일공동체를 세워 밥퍼운동을 지방으로 확대했고 지금은 중국.캄보디아.필리핀 등 해외까지 퍼졌다. 급식비는 2만여 명의 후원회원이 내는 후원회비와 한국전력.외환은행.SK 등의 기업체 후원금 등 매달 2000여만원으로 충당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매일 1500여 명의 노숙인과 노인들이 무료급식 혜택을 받고 있다.

권호 기자<gnomon@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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