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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써둔 묘비명 “나이 90에 생각해보니 89세까지가 헛된 인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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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자기 죽음을 미리 준비해왔다. 그는 생전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는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JP, 2015년 박영옥 여사 별세 뒤 준비 #“내조 베푼 영원한 반려자와 눕다”

그런 JP답게 생전에 자신의 묘비에 들어갈 글귀도 미리 준비해뒀다. 평생의 반려였던 박영옥 여사가 숨을 거둔 2015년 3월에 121자를 썼다. 내용은 이렇다. 괄호 안은 한자어를 풀어쓴 것이다.

“사무사(思無邪·한 치의 허물 없는 생각)를 인생의 도리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 무항산이무항심(無恒産而無恒心·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을 치국(治國)의 근본으로 삼아 국리민복(國利民福)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구현하기 위하여 헌신진력하였거늘 만년에 이르러 연구십이지팔십구비(年九十而知 八十九非·나이 90에 생각해 보니 89세까지가 모두 헛된 인생이었구나)라고 탄(嘆)하며 수다(數多·숱한)한 물음에는 소이부답(笑而不答·별다른 말 없이 그저 웃다)하던 자- 내조의 덕을 베풀어 준 영세반려(永世伴侶)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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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박정희와 함께 거행했던 5·16 쿠데타 이후 한평생 공직자와 정치인으로 살았던 그는 묘비 글귀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생활이 안정되는 게 최우선이라는 마음으로, 국민의 복지와 평안함을 구현하기 위해 한평생 진력했다”면서도 “나이 90에 생각하니 모두가 헛됐다”고 돌이켰다.

살아생전 금실이 좋기로 유명했던 부인 고(故) 박영옥 여사를 향해서는 “온갖 질문에도 별다른 말 없이 미소 짓던, 영원한 반려자와 함께 누웠다”며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박 여사는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딸이다. JP는 총리를 지내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2015년 박 여사가 소천했을 때 빈소에서 조문객들을 만나 “마누라하고 같이 누워야겠다 싶어 국립묘지 선택은 안 했다”고 말했다. “먼저 저 사람이 가고 나는 언제 갈지…. 외로워서 일찍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라는 말과 함께였다.

권호 기자 gnom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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