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 "형사 고발 않겠다"…수사협조ㆍ징계키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김명수 대법원장이 15일 양승태 사법부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및 재판거래 의혹에 대해 “직접 검찰에 고발하지 않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대신 추후 검찰수사가 진행된다면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다. 사실상 ‘공’을 검찰에 넘기는 모양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최종 결론 #대법관ㆍ법원장 반대한 형사조치 #대법원장도 부적절 판단한 듯 #내부 징계, 검찰 수사협조는 계속

입장은 대국민 담화문 형식(A4용지 4장 분량)으로 공개됐다. 핵심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법원행정처에서 사법행정권 남용에 관여한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상 조치 여부였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15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김 대법원장은 이날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고발이나 수사의뢰 등 형사조치는 하지 않되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뉴스1]

김명수 대법원장이 15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김 대법원장은 이날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고발이나 수사의뢰 등 형사조치는 하지 않되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뉴스1]

김 대법원장은 오후 1시 40분쯤 법원 내부통신망을 통해 “저는 비록 최종 판단을 담당하는 기관의 책임자로서 섣불리 고발이나 수사 의뢰와 같은 조치를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미 이루어진 고발에 따라 수사가 진행될 경우 인적ㆍ물적 조사자료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대법원장 명의ㆍ사법부 차원의 직접 고발 대신, 이미 이뤄진 시민단체 고소ㆍ고발에 따라 수사가 진행될 경우 협조하겠다는 의미다. 현재 관련 사건 10여건이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에 배당돼 있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공공형사수사부가 삼성 노조 와해 의혹 등 수사에 주력하고 있는 만큼 사건을 재배당하기로 했다. 검찰은 주말 사이 논의를 계속한 뒤 18일쯤 재배당을 결정할 예정이다.

“관련자들을 고발해야 한다”는 젊은 판사들과 “그래선 안 된다”는 고참 판사들의 대립에, 김 대법원장이 나름의 절충안을 낸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장이나 법원이 직접 검찰 고발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지만 형사 절차를 포함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는 전국법관대표회의 결의안(11일)과도 비슷하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되는 담화문은 크게 사법행정권 남용과 재판 거래로 나눠 입장을 담았다. 판사 블랙리스트로 통칭되는 사법행정권 남용에 있어선 “사법행정권자의 뜻과 다른 소신을 드러냈다는 것만으로 법관들이 다른 법관들에 의해 뒷조사의 대상이 된 것은 법관독립이라는 중대한 헌법적 가치를 침해하는 것으로 결코 허용될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내부 징계조치 대상이 된 판사들도 대부분 이에 연루되어 있다.

재판거래 의혹에 대해선 “법관들이 사법행정권자의 요청에 의해 재판의 진행과 결론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의 재판거래 의혹을 ‘사실무근’에 가깝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면서도 “재판이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외관을 꾸며내는 행위만으로도 사법부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라며 “저의 개인적 믿음과는 무관하게, 재판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였다는 부분에 대한 의혹 해소도 필요하다”고 했다. ‘재판 거래’를 기정사실화하지 않으면서도 형사 조치를 비롯한 강경 여론을 의식한 듯한 애매한 표현이었다.

김 대법원장은 “앞으로 수사 또는 재판을 담당하는 분들이 독립적으로 오로지 법과 원칙에 따라 진실을 규명해 나갈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했다. 공을 넘겨받게 된 검찰은 법원 조사보고서 분석에 나서는 등 강제 수사에 대한 내부 검토에 들어갔다.

지난 11일 오전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법관대표들이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 11일 오전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법관대표들이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중앙포토]

이날 김 대법원장은 현직 법관 13명에 대한 징계도 청구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4명과 지방법원 부장판사 7명, 판사 2명이 대상이다. 이름과 현 직책 등은 명시하지 않았다. 김 대법원장은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감수하고 징계절차에 회부했다”라고 심경을 밝혔다. 재판거래 의혹과 관련된 대법관들(7명)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또 조사가 미진하다는 지적을 감안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이 확보한 모든 인적ㆍ물적 조사자료를 영구 보존할 것도 지시했다. 김 대법원장은 “자료의 영구보존은 사법부 스스로가 지난 잘못을 잊지 않고 그 잘못을 시정할 수 있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겠다는 다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조단의 조사결과 발표가 있은 지 20일 만에 김 대법원장이 최종 결론을 내렸지만 논란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방법원 단독ㆍ배석판사 등 소장파 법관들로부터는 “고발까지 검토하겠다던 입장에서 물러선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될 공산이 커졌기 때문이다.
고위 판사들도 불만이 많다.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아직 수사도 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 ‘재판’까지 언급하면서 진실을 규명하자고 한 것은 기소를 하라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부적절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3월부터 시작된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파문은 재판거래 의혹으로 번지면서 파장이 커졌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최종 결론을 내렸지만 당분간 혼란은 수그러지지 않을 전망이다. [연합뉴스]

지난해 3월부터 시작된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파문은 재판거래 의혹으로 번지면서 파장이 커졌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최종 결론을 내렸지만 당분간 혼란은 수그러지지 않을 전망이다. [연합뉴스]

법원은 지난해 3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이번 의혹을 세 차례 조사했다. 결론은 비슷했다. 블랙리스트는 없었고 행정처의 권한 남용은 있었지만 형사처벌할 사안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3차 조사에 해당하는 특별조사단은 ‘재판 거래’ 의혹도 언급했다. ‘양승태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정권에 유리한 재판 결과를 활용해 청와대와 거래를 시도하려는 내용의 문건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의혹을 조사한 대법원 특별조사단은 지난달 25일 “실행되지 않아 형사 처벌하기 어렵다”고 발표했다. 그런데도 일부 판사들은 “국민과 함께 고발하겠다”고 했고 김 대법원장도 동조하는 듯한 말을 해 논란이 증폭됐다.

관련기사

◇대법관들 “재판거래 근거 없다”=대법관들도 입장을 냈다. ‘대법관 일동(대법원장 제외)’ 명의의 입장문을 통해 “재판거래 의혹에 대해 대법관들은 이것이 근거 없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고 밝혔다.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법원행정처는 대법원의 재판부와는 엄격히 분리되어, 사법행정 담당자들은 재판사무에 원천적으로 관여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게 대법관들의 설명이다.

또 “대법원장과 대법관이 독립해 대등한 지위에서 합의에 참여하는 대법원 재판에서는 그 누구도 특정 사건에 관하여 자신이 의도한 방향으로 판결이 선고되도록 영향을 미치려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대법관들은 지난 1일과 12일 두 차례에 걸쳐 대법원장과 간담회를 갖고 고발ㆍ수사의뢰 등 형사조치에 반대 의견을 냈다. 대법원 재판에 대한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해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김 대법원장 취임 이후 임명된 신임 대법관들까지 한 목소리를 냈다고 한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관들께서는 대법원 재판에 대법원장 등 외부 개입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대법원장께서 분명히 밝혀주길 원하셨는데 대국민 담화문엔 완곡한 표현만 담겼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김 대법원장께서 숙고 끝에 ‘의혹을 갖는 국민 여론을 외면할 수 없고 재판이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외관이 형성된 것만으로도 사법부의 불신이 야기된 것’이라는 입장을 정리하신 걸로 안다”고 말했다.

현일훈ㆍ문현경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