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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경기도 안 했는데 김 빼지 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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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장혜수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스포츠부 차장

장혜수 스포츠부 차장

2002년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출장 중이었다. 한·일 월드컵을 앞둔 한국 축구대표팀의 미주 전지훈련 동행취재였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월드컵 전초전으로 출전한 북중미 골드컵에서 1승(승부차기 승리는 공식기록상 무승부)도 챙기지 못했다. 조별리그에서 1무 1패로 8강에 올랐고, 8강전에선 멕시코에 승부차기로 이겼다. 준결승전에서 코스타리카에 1-3으로 진 뒤 3~4위전에서 캐나다에 1-2로 져 4위에 그쳤다. 국내 여론은 난리가 아니었다. 한 원로 축구인은 “지금이라도 히딩크를 자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함께 출장 중이던 한 기자는 대표팀 관계자에게 “회사에서 세게 조지고 들어오란다”는 말을 전하고 귀국했다.

3~4위전 전날 대표팀 숙소를 찾아가 몇몇 선수를 만났다. 휴식시간에 호텔 정원을 산책하던 L과 C, S였다. 컨디션을 묻자 L은 “감독이 이상하다. 경기 당일 오전에 파워프로그램(고강도 체력훈련)을 시킨다. 근육이 뭉쳐 뛰기도 힘들다. 그런데 훈련을 할수록 몸이 올라오고 좋아지는 게 느껴진다”고 했다. 4강 신화의 밑거름이 됐던 ‘공포의 삑삑이’ 등 체력훈련이 한창이던 때다. 데스크에 이런 사실을 보고하면서 “선수들 얘기가 ‘월드컵에서 뭔가 할 것 같은 느낌’이라 한다. 4위를 해도 이런 내용을 담아 기사를 쓰겠다”고 했다.

많은 취재진이 히딩크 팀을 ‘세게 조지고’ 귀국했다. 2차 전훈을 위해 샌디에이고로 이동한 뒤 히딩크 감독을 따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티타임이나 하자”며 자리를 만든 히딩크 감독은 “우리 목표는 골드컵이 아니라 월드컵이다. 월드컵 첫 경기 때 선수들 상태가 최고가 되도록 장기계획을 세웠다. 골드컵에서 성적 좀 내려고 계획을 접을 수는 없다”고 했다. 온갖 비난 속에서 히딩크 팀은 묵묵히 1%씩 전력을 끌어올렸다. 4강 신화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씌었다.

한국 시각으로 14일 밤 12시에 2018 러시아 월드컵이 개막한다. 1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평가전에서 1-3으로 지고, 7일 볼리비아 평가전에서 0-0으로 비긴 신태용 팀을 향한 팬들 시선이 곱지 않다. 이기면 좋았겠지만 평가전은 승리보다는 문제점을 찾아 개선 방안을 모색하는 게 더 중요한 경기다. 운 좋게 이겨 문제점을 놓친다면 그게 더 큰 문제다.

정확히 일주일 뒤인 18일 오후 9시 조별리그 1차전 스웨덴전이 열린다. 한데 모여 응원하기 좋은 시간대다. 경기가 끝난 뒤 환호할 수도, 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개막식도 안 했는데 김 빼지 말자. 우리가 지금 할 일은 ‘닥즐’(닥치고 즐기기), ‘닥응’(닥치고 응원하기) 준비하기다.

장혜수 스포츠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