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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북청 사자 놀음 동성영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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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사자가 없는 나라인데 웬 사자놀음일까. 한국은 호랑이가 많던 고장이므로 범굿·범놀이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데 한국 각지의 탈춤판에 호랑이는 없어도 사자는 한몫 한다. 황해도 봉산과 은율 탈춤에 나옴은 물론 수영 들놀이와 통영 오광대에도 곁다리로 잠시 등장한다.
하회의 주지탈도 사자로 보는 견해가 그럴싸하고, 단원이 그린 평양감사 연광정 연회도의 그것 역시 사자임이 분명하다. 함경도 북청의 경우에는 아예 가면희의 명칭부터 「사자놀음」이요, 놀이 전체를 이끌어 가는 중심 테마가 사자 두 마리..

<탈꾼 장사여야 제격>
중요무형문화재 15호 북청 사자 놀음. 해방 후 월남한 실향민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고향에서의 일을 되새기는 놀이판이다.
물론 동제의 일환으로 행하는 마당밟기(지신밟기)를 의해 사자춤을 췄었다. 사자놀음을 떠들썩하게 잘 해낼수록 마을이 무사하고 풍요로와 진다고 믿고 있었다.
『섣달 초부터 도청(마을공회당) 마당에서 놀이가 시작되면 정월대보름까지 한달 이상 했지요. 그러니까 장정들이라면 조금씩은 다할 줄 아는데 진짜 춤꾼은 따로 있었지요. 힘이 좋아야 사자가 펄펄 잘 뛰니께…』 사자 앞채를 맡고 있는 지정보유자 동성영씨(79·서울)는 13세 소년 때 『저느마 할끄 같다이』 소리를 들었고, 처음으로 한판 뛰놀고 박수와 칭찬을 귀따갑게 받았다. 두 사람이 사자 한 마리를 연출하는 사자춤(표준어는 사지탈·사지춤)의 탈꾼은 사자 같은 장사여야 제격이기 때문이다.
용정 씨름판에서 관록을 얻었던 동씨다.
북간도 용정이라면 여진족·만주족 같은 거구들이 끼어드는 드센 씨름판이었는데 거기서 힘 겨뤄 주름잡던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비록 소는 못 탔지만 2등까지 올랐던 관록이 그것이다. 신장 1m80cm에 한창때 체중이 1백40kg.
특히 사자 앞채의 탈꾼은 힘이 좋아야 사자의 동작이 크고 다채롭게 마련이다. 사자 머리를 좌우로 휘젓고 아래로 굽혔다가 위로 치올릴 때 춤사위가 민첩해야 보기 좋다.
또 사자탈의 가늠자를 두 손으로 죄어 사자 입을 턱턱 맞춘다든가, 토끼를 어르다가 잡아먹는 장면 등이 밖에서 보기보다 안에서 연출하는 탈꾼에겐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앞사람이 뒷사람의 어깨에 올라타기도 한다.

<춤사위 빨라야 멋져>
『잡생각 할 겨를이 뭡네까. 20∼30분 탈 쓰고 뛰면 한겨울에도 땀에 흠뻑 젖지요』 요즘엔 종이탈이라 가버운 터이지만 북청에서 놀 때는 피나무를 파서 썼다. 『어디 탈춤이 북 청사자만 합네까』
어디서 온 사자들일까. 사자는 본시 남서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사는 맹수다. 극동에서 보면 서역에서 들어온 짐승이다. 메소포타미아의 경우 BC 3천5백년 전 사자를 그려넣은 유적이 있고, 인도에 있어서도 기원전 수세기 전 「아쇼카」왕의 석주사자가 유명하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훨씬 뒤늦은 후한 무렵부터 돌조각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이전에는 사자보다 단연 호랑이다.
그런데 육조를 거쳐 당대에 이르면 각 방면에 사자의 묘사가 현저해진다. 서역과의 교류가 빈번해진 탓이겠고 불교미술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그것이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경로다.

<사자는 서낭 수호신>
이미 고구려에는 서역의 음악과 가면무가 전래되어 고구려 락의 주요한 요소를 이루었다고 한다. 즉 서역으로부터 진기한 문물이 함께 유입됐으리라는 추정이다.
실제로 경주의 이국시대 고분에서는 유리제품과 보검 등 페르시아 물건의 출토가 결코 적지 않다. 지증왕 때 울릉도 평정에는 나무로 깎은 사자대를 거느렸다고 하거니와 우륵의 l2곡 가운데 사자기란 말이 있다.
그래, 사자의 모습이나 시늉을 굳이 해서 어쨌다는 것일까.
원시사회에 있어서 맹수를 내세우는 것은 수렵 의식에서 발전된 주술의 연장으로 물이되는 것이 보통이다. 일본에 있어서 사자기는 확실히 액을 물리치는 힘을 나타내는 것이지 노리개로서 희롱하는 짓이 아니다. 아마 우륵의 시절에도 의도하는 바는 같았을지 모른다.

<망향의 놀이로 흥행>
그런 재액을 막아주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라면 한국의 경우 단연 호랑이인데 현재 남아있는 상태가 사자로 치우친 것은 아무래도 수수께끼다. 그것은 아마 한국의 원시종교·고유 신앙 체계와의 상관관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국에서 호랑이는 위엄과 덕을 갖춘 산신이다. 함부로 옮기거나 감히 놀이 도구로 삼을 수 없는 신성한 존재다. 물론 산신은 동신은 아니다. 마을의 주신이요, 농신은 서낭이다. 말하자면 사자는 멀리 서역에서 전해오면서 서낭을 수호하는 신장도 되고, 혹은 토속적인 요소를 수용해 어느 정도 변질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해방 직후 46년 월남했는데 마땅히 할 일이 있어야죠. 그때 서울공대 부근의 미군부대에서 걸레를 가져다 빨아 사자탈을 만들었지요. 옛날에는 삼끝(삼껍질의 폐기분)으로 만들어 가볍고 태도 났지만 걸레에다 염색해 쓰니 좀 무겁습디요』
그때 12명이 모여 추석놀이를 벌였더니 집회허가가 없다는 이유로 모두 경찰서로 잡혀 갔다. 동란후 청량리에 다시 모여 옛 고향에서 처럼 하자며 전농동·회기동 일대를 순회 공연하기도 했다.
북청 고유의 퉁소 대신 단소를 불고 미군용 석유통을 베어 징을 만들어 치는 형편이었다.관람객이 모여들자 논산농악대를 불러들여 놀이판을 키우기도 했다. 망향의 놀이인데 어려운 시절의 처지로선 그런대로 흥행이 된 셈이다.

<걸레에 염색해 사용>
물장수해서 자녀 학비를 댔다는 북청 사람들이다.
뚝심 좋고 끈질기기로 소문난 사람들인데 퉁소소리와 사자탈을 보면 오금못펼 정도로 애향심이 철저한 북청 사람들이다.
1962년 처음으로 민속경연대회가 열릴 무렵 일부 4백원에 비짓국을 먹으면서 사자놀음을 연습했다. 그때 동옹은 목수 일을 하는 터여서 벌이가 괜찮았다.
대자귀로 직경 7치의 서까래를 하루 5개씩 깎은 힘 좋은 목수여서 대들보와 굽도리를 깎았다. 그런 터에 비짓국으로 허기져서 탈춤추기가 어려웠지만 고향을 생각하며 서로 독려해 해마다 경연대회에 나갔다. 상이 문제가 아니라 탈춤놀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웠다.
사자놀음은 보통 40여명으로 구성된다. 사자 탈꾼으로 2명씩 4명, 퉁소와 징·소고에 최소한 4명, 무동 역시 4명, 꼭쇠·양반·영감·마누라·처녀·총각·의원·승려·승무·사령·등 꾼 등이 20여명.

<퉁소가 단연 주악기>
돌이켜보면 퉁소만큼 가장 보편적인 악기도 없다. 삼현육각이 특별한 계층을 전제로 한다면 서민 사회의 보편적인 악기는 피리와 퉁소일 것인데, 북청 사람들은 그 중에도 선이 굵은 퉁소를 택해 왔다. 더구나 북청 퉁소는 청공에 갈대청을 붙인 것이 특징이고 대가 긴만큼 가락구멍(지공)의 간격도 넓어 손마디가 짧은 사람은 가락 집기가 거북할 정도다.
그 중에도 퉁소는 많을수록 소리가 구성지다. 황해도 탈춤이 삼현 육각을 울리고 영남 탈춤이 농악 중심인데 비해 북청에선 단연 퉁소(사투리로는 퉁세)가 주된 악기다.
북청 특유의 애원성 반주는 저음의 단조한 퉁소 소리가 걸맞다. 3분박의 좀 느린 굿거리 장단이다. 함경도로부터 경상도에 이어지는 메나리토리 문화권에 속하지만 어쩐지 아랫녘과는 다른 선율을 갖고 있다. 북도와 만주에 걸치는 특유의 가락일 것인데, 아직 민속음악계에서도 이에 관한 연구가 불충분한 실정이다.
『사자놀음을 여기 와서 복원할 때 사자를 잘 만들어 보려고 창경원에 가서 사진 찍고 야단 피운 적이 있었지요. 그랬더니 경연대회에서 엉터리라고 퇴짜 맞았지요』
동옹은 30년 전 일을 추억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한국의 전래 사자는 동물원의 실물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1천년전 일본의 평안시대 그림인 『신서고악도』에 나타난 사자무를 보면 통일 신라 때의 석사자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2세들 잊을까 걱정>
전신에 털가죽 옷을 입은 듯하고 부리부리한 눈과 떡 벌린 입이 꽤 사실적이다. 한국의 고대 사자탈도 그랬을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에 전승된 탈은 까치 호랑이의 민화가 그러하듯 한국인 속에 순화되고 토착화된 사자의 얼굴이다. 그 너부데데한 면판이며 마냥 큰 입매가 유순하고 익살스런 한국인의 얼굴 그대로가 아닐까.
동옹은 이제 월남 2세대가 고향의 정취를 하마 잊어버리지 않을까 근심이다. 동란 전후의어려운 시절에도 끊임없이 재현했던 놀이인데 지금 보존회의 운영이 전만 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자탈을 모작하고 퉁소를 만들어 보급해 보지만 별무소득이다. 고향마을의 도청 같은 회관만 있다면 남녀노소가 서로 모여 고향의 정취를 익히는 터전이 되리라는 꿈, 그것뿐이다.
글 이종석(중앙일보 호암갤러리 관장·문화재 전문위원) 사진 임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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