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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서 광복절 43주 맞는 마지막 의열 단원 김승곤 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어도 중국에서의 항일 투쟁 당시를 회고하면 바로 엊그제 일 같아요』
55년 전인 지난 33년5월8일 전남 목포를 떠나 독립 투사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18세의 한창 나이에 중국행 화물선에 몸을 실은 김승곤 옹 (73·한국 독립 동지 회장).
의열 단원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했던 국내 유일의 생존자 김옹의 광복절 43주년은 매우 뜻깊다. 한국인으로 「중국의 악성」이 된 정률성씨 (본명 정부은·중국명 유대진)의 소식을 중앙일보 8월13일자를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김옹은 정씨가 당시 자신과 함께 피끓는 「7인의 청년」 중 한사람으로 동행했던 사이였다며 당시의 추억에 잠겼다.
김옹이 의열단과 인연을 맺은 것은 정씨의 형이자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하던 정의은씨(당시 30세·사망)가 의열 단원 모집 차 국내에 잠입, 김옹 등 6명을 규합, 중국으로 데려 갔을 때.
학생 차림에 「공부하러 간다」며 수차례의 집요한 일경의 검문을 뚫고 중국에 도착한 것은 그해 5월13일 상해시 항구.
도착 1년 전인 32년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독립 투사들에 대해 더욱 심해진 감시망을 뚫고 당시 수도 남경 등지를 전전하다 정착한 곳이 강령진.
남경에서 70리 거리인 이곳에는 함께 온 사람들을 교육시킬 조선 혁명 군사 정치 간부 학교 (의열단 간부 학교)가 있었다.
산골에 들어선 절간 일부를 빌어 교실로 사용하고 인근 공동 묘지 4백∼5백평을 빌어 훈련장으로 사용한 이곳에서 김옹은 단원 56명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
34년2월 2기생으로 6개월간의 훈련을 마치고 정식 간부가 된 김옹은 이후 남경의 중국 육군사관학교에서 1년 과정의 군관 양성 과정을 거쳤다.
이는 김구 선생과 장개석 당시 국민 정부 군사 위원회 위원장과의 합의로 의열 단원의 사관학교 교육 과정이 이뤄졌기 때문.
김옹은 2년반 동안 각종 교육을 이수한 뒤 황민·호영·김해 등의 중국명으로 당시 인솔자인 정의은을 비롯, 정부은 (정률성) 김재호 (신익희 옹의 사위·사망) 최명선 (사망) 김일곤 (김옹의 사촌형·사망) 정국훈 (사망) 등과 함께 지하 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함께 의열 단원으로 출발했으면서도 일부는 지하 운동 중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뒤 사망하거나 당시 중국 내 정치 상황상 섬서성을 거쳐 만주에서 공산당원이 되는 운명을 맞기도 했다는 것.
14년간의 중국 생활 대부분을 일본군과의 전투, 중경 임시 정부에서의 활동 등으로 보냈던 김옹은 항상 권총의 일종인 간부용 「뿌커창」 (포창)을 차고 다니며 중국군과의 연합 작전을 통해 일본군과 20여 차례의 유격전을 치러냈다.
37년 중일 전쟁 이후 초창기 승승장구하던 일본군과의 싸움은 중국군으로서는 「대포 대 부지깽이」의 전쟁일 정도로 형편없는 열세에 처했던 실정이라고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중국의 곡창 지대인 호남성 장사 대회전은 자신의 항일 유격전 가운데서 가장 통쾌한 사건이라고 전했다.
비록 초토항전으로 곡식과 당시 중국 번화 도시가 불타버렸지만 일본군의 주둔을 불가능하게 만든, 일본 군기를 꺾은 최초의 유격전이었다는 것.
14년간의 독립 투사 생활을 마치고 지난 46년7월 귀국한 김옹은 『청춘을 바친 대가는 바라지 않았지만 그를 맞은 것은 가난뿐이었다』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한때 중국 화교 학교 한국어 교사를 하기도한 김옹은 지난 77년 광복회와 인연을 맺은 뒤 77년이래 회원 1백명의 사단 법인 한국 독립 동지 회장직을 맡고 있다.
2남 2녀를 둔 김옹은 『서울 금호 1가동 931 달동네 12평짜리 무허가 블록 집에서 장남 부부와 함께 이제까지 재산세를 한번도 내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아왔지만 떳떳한 독립 한국인 자격으로 의열단 추억이 어린 남경 등지를 찾아가 보는 것이 이제 남은 인생의 유일한 소원』이라고 말했다. <김기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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