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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재주에 몸에 밴 70년 유랑인생|발탈 이동안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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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결혼 사흘만에 집을 빠져 나와 이틀 후 운 좋게 광무대에서 줄 잘 타는 신동이 됐다. 한창 세월 좋을 때는 회갑연에 초대돼 5일 동안 놀고 논 32마지기를 사기도 했다.
왕년의 줄타기 명수 이동안옹(82). 줄 위에서 재주넘기 잘하는 살 판이라면 그의 이름이 첫손 꼽혔는데 그밖에 춤사위와 장고에도 둘째가라면 서운해하신다.
그런데 중요 무형문화재(79호)지정 종목은 어느 사전에도 용어가 안나오는 유별난「발탈」.
발바닥에 탈을 씌운 반신 허수아비가 재담하고 노래한대서 발탈인데 이 탈놀이에는 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부득이 그의 하고많은 재능가운데 발달을 뽑아 전승토록 조처한 것이다.
발탈은 바른 발에 탈을 씌워 고갯짓을 시키면서 두 손으로 허수아비 팔을 조종하는 1인 인형극에 불과하지만 놀이 진행은 탈꾼이 입심 좋고 잡가에 능해야 제격이다. 그야말로 탈은 제쳐놓고 재담 듣는 맛이 구경거리인데 그 재담을 유도하는 어릿광대의 익살과 너름새(춤과 형용의 몸짓)가 잘 어울려야 일품이요, 악사가 또한 흥이 깨지지 않게 계속 풍악을 울러준다. 그러므로 발탈을 전수교육하자면 온갖 재간이 다 부수되게 마련이다.
우리 속담에 열 두 가지 재주를 도리어 부질없는 것으로 빗댄 언사가 있다. 꼭 이 할아버지를 두고 한말인 듯, 그의「보존회 연구소」에서는 춤 선생으로 통한다 .옛 재인 청에 전해오던

<13세때 남사당패에>
전통무용의 기본을 비롯해 살풀이·진쇠춤·태평무·검무·승무·희극무·선달무·국춤· 소고 춤 등 무엇이나 척척이다.
그런 춤 가운데 독특한 것일수록 장고 장단이 따라줘야 한다. 노래 장단과 춤 장단은 다를뿐더러 춤이야말로 장단이 안 맞으면 풀리지 않기 때문에 춤도 알면서 장고도 수십 가지 가락의 변주에 능통해야 한다.
이제 할아버지는 연로해 보행조차 지난날처럼 날쌔고 가벼울 수 없는 터지만 장고 칠 때 『떵 떵』소리는 여전히 다부지게 울린다. 바로 신명에서 솟아나는 힘이다.
여북 하면 열채(장고의 채편)잡은 중지의 손가락 마디에 굳은살이 혹처럼 돋았겠나 싶다. 『13살까지 화성군 향남면에서「통감」네째권을 배우고 있었는데 인근에 든 남사당패의 꾐에 빠졌지요. 그래 이튿날 책보와 도시락 망태를 뒷산 소나무 꼭대기에 매놓고 따라나섰죠. 그런데 수원지방을 도는 사당패에 섞여 있으면 잡힌다고 기차 태워 황해도 재령으로 가 다른 패거리에 넘겨줍디다.
다음날부터 땅재주를 배우는데 몽둥이로 들구 패서 도망도 쳐봤지만 번번이 잡히고 꼼짝 못하는 거죠. 땅재주를 터득하니까 1년만에 줄 가르치고 재담까지 가르치더군요. 보통 줄 위에서 뛰기는 해도 재주넘기는 쉽지 않지요. 거꾸로 떨어지면 머리 깨지고 절딴 나니까. 그래도 줄 잘 타면 우쭐댈만 했죠. 먼길을 걸어다니면 줄타지 못한다고 10리만 돼도 말 태워 경마 잡혀줬으니까요.』
이렇게 그의 한평생 행각은 소싯적에 이미 결정됐다. 유람인생이요, 한량인생이다. 지금 3남5녀의 자녀가 어엿이 성장했음에도 자유롭게 사는게 좋아 홀로 연구소에서 기거하신다. 30대 젊었을 때는 승마하고 활쏘기와 매사냥도 했다. 술을 꽤했거니와 가야금·대금 등 악기도 여러 가지를 다를 줄 안다. 그리고 소리는 발탈의 필수과목.
그야말로 다재 다능한 재인 이기에 앞서 풍류에 젖어 산 1급 한량이다.
『섣달 그믐께 황주에서 잡혀 왔지요. 아버님이 2년간 동서남북으로 날 찾아 헤매셨던 거지요. 이젠 죽었다 싶었는데 할아버지께서 「어린게 뭘 안다고…아비 앞에선 자식을 못 때린다」고 야단쳐 겨우 면했는데 그만 호랑이 당숙한테 걸렸지요. 하동 원님으로 계실 때 그러셨던 것처럼 멍석 깔고 엎어 놓으라시더니 선안반(볼기치는 판목)으로 피나게 쳐라, 한대 맞고 궁둥이가 쩍 갈라지고 까무러쳤죠. 명일 지나고 바로 서둘러 장가들었는데 새악씨고 뭐고 다 귀찮고 오로지 놀이판 생각 뿐이라 사흘만에 또다시 내 뛰었던 것이지요.』
그의 회고담은 누에 실 뽑듯 했다.
재담꾼의 경험담이니 막힘도 없으려니와 군살 붙일데도 없다. 생애 자체가 드라마틱한 소설이다. 행운으로 잘 뻗는가 싶으면 뜻밖에 액운이 휘몰아쳤다. 평생을 잘 처신해 이름 석자 남기게된 서민의 얘기지만 그 속에는 한 시대의 소박한 욕망과 가치관의 변화, 잊혀진 풍속사의 단편들이 번뜩인다.
15세 소년 이의 꿈은 신방을 뛰쳐나온 다음 다음날로 성취됐다.
당시 서울에는 큰아버지 댁이 있었지만 빈털터리 소년은 노량진 거리를 배회하다가 앞서 소년의 재주를 눈 여겨 봐줬던 황주 사람을 만나 광무 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광무대는 1912년에 세운 당대 유일의 구극 전용극장. 그가 광무대에 들어간 것은 을지로에 극장을 개축(1920년)한 직후의 전성기다.
마침 줄타던 사람(김부억)이 나이 들어 새 사람을 찾던 참이라 소년의 벌 날듯 하는 재주를 보자 즉각 월급을 곱으로 쳐 3천원에 계약했다고 그때 3천원이면 소 두 마리 값. 그런데 소년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구경꾼들의 팁이었다. 줄에서 내려오면 서로 불러 돈을 쥐어주는데 그게 월급 못지 않았다.
미소년의 소문이 장안에 퍼지자 수원에서 호랑이 당숙이 찾아와 다짜고짜 손목을 잡았다. 이제 도망칠 구멍조차 없어 하숙방으로 모시고 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 동안 번 돈 1만여원을 내놓으며 설득했다. 집안 망신이라고 혀를 차면서도 월급생활이라는데는 세월의 속절없음을 한탄할 뿐. 그 뒤로는 가족의 왕래가 잦아지고 아내를 데려와 신접살림을 차렸다.

<어릿광대가 흥 돋워>
발탈은 이때 배운 장기의 하나다. 발탈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남사당과 같은 연회 집단에서 무대 공연종목으로 발전시킨 것이리라 짐작될 따름이다. 광무대에는 본시 박춘재라는 분이 있었다. 탈 쓴 반신 허수아비의 팔꿈치와 팔목에 노끈을 연결시켜 팔이 2중으로 움직이게 조작하거나, 혹은 직접한 삼을 손에 쥐고 춤추어 보임으로써 서민들을 대신해 그들의 애환을 속 시원히 풀어줬다.
발탈에서 탈을 이용하는 것은 가면극의 묘를 살린 것이요, 재담과 노래를 곁들여 가무극적 특징을 가미했다. 몸통을 고정시켜놓고 얼굴과 팔짓만 하게 한 것은 인형극의 요소인데 역시 발탈의 동작에는 한계가 있고 단조로운 춤사외를 반복하기 때문에 포장 밖에서 어릿광대가 짓궂게 관심을 돌리면서 흥을 돋우는 것이다.
탈꾼이 2m×1m의 비좁은 포장 속에 숨어 온갖 재담과 소리를 엮어 가는 것도 묘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적어도 1인3역이므로 포장 속이 여간 궁금증을 자아내주는게 아니다.
어릿광대=요 이마빼기는 굴러 댕기는 쪽박 같은데다가 아가리는 또 메기 아가리 같이 커 가지고 꼭 대부인 뭣 같다 이놈아.
탈꾼=자식아, 모르는 소리 말어. 내 얼굴이 얼마나 잘생겼다고. 눈은 소상강 물결이요, 코는 세워놓은 마늘쪽처럼 오뚝하고 두 입술은 빛난 당채주홍필로 꼭 찍은 것 같고, 아, 얼마나 잘 생겼니.
재담은 허튼 소리가 아니다. 때로는 사회를 보는 비판력과 관찰력이 날카롭지만 웃음과 익살로 넘겨짚어야 한다.
혹은 부도덕한 넋두리와 털털하고 추한 면까지 세속의 인간성을 즉흥적으로 폭로한다. 어릿광대는 옆에서 말대꾸하며 탈꾼이 속 시원히 털어놓도록 심사를 꼬드긴다. 말하자면 어물쩍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자다. 그럴수록 안할 소리 못할 소리까지 마구 튀어나온다. 탈이 매 맞고 괴로워하거나 놀란 표정을 지을 경우, 혹은 허탈하게 웃을 때도 발목을 흔들어 탈을 끄덕이고 팔을 벌려 한삼 자락을 떤다.

<임방울과 순회공연>
춤사위는 고작 어깨춤과 좌우치기 및 목놀이의 세 가지. 대나무를  자로 휘어 감은 두 자루의 채를 돌리고 저어서 동작하는 것으로 간략화 됐다.
간간이 부르는 노래는『팔도유랑가』를 비롯해『쑥대머리』『개성난봉가』『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고사창』과 각도 잡가 등 두루 부른다. 그렇게 민중사회의 귀에 익은 노래로 정서의 반려자가 되고 울분을 풀어 어루만져주는 구실을 했다.
빼어난 예능의 소유자요, 소년들의 꿈을 일깨우던 선망의 예인이다. 그 영욕의 마지막 세대를 살아온 이동안옹은 그 몰락의 비탈길에 버티고 선 몇 분 중 한분이시다.
한때는 일인의 꾐에 속아 대판까지 한 무리를 이끌고 갔다가 거지꼴이 되어 가까스로 살아온 적도 있다.
임방울·이화중선과 더불어 중국·만주로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고 해방 후에는 각 지방도시에서 국악과 무용학원 등을 통해 후진 양성에 힘썼다. 동래야유를 복원할 때 한동안 춤을 지도했고, 북춤을 3고에서 11기까지 시도한 것도 그였다. 6·25동란 후 여성 농악단 조직에도 선구적 역할을 했으니 그의 문하생을 따지자면 부지기수다.
이동안 옹은 어렵게 어렵게 사람(예인)을 길러낸 숱한 사례를 기억하고 있지만 세상 풍토 때문인지 모두 그의 곁을 떠난 뒤돌아보질 않는다.
83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은 이후 해마다 꼬박꼬박 발표회를 갖고 있지만 노인 혼자로는 점점 힘에 부치기만 한다.
발탈과 줄타기를 제외하더라도 이옹의 춤과 장고가락은 보물단지임에 틀림없는데 금년 봄 망우리로 연구소를 이사한 뒤로는 수강 신청자가 없어 한걱정이시다. 40만원의 집세마련마저 어렵게돼 한 측근은「이동안 선생님 후원회를 만들자고 절박한 제의를 한다. <글 이종석(중앙일보 호암갤러리 관외문화재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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