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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가 심상치 않다|신성순<경제부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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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물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정부는 당초 올해 물가 상승률을 4∼5%선에서 잡겠다고 큰 소리쳤지만 7월말에 소비자물가는 이미 4.9%나 뛰었다. 지난해 8월부터 따진다면 1년에 7.9%상승을 기록했다. 식료품만을 본다면 11.6%의 두 자리 숫자 상승률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이처럼 치솟는 물가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를지 예측조차 하기 어렵다는데 있다. 물가를 부채질할 요인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가장 심각한 것은 통화증발 문제다. 늘어나는 총통화를 잡을 방안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통화가 늘어난다고 반드시 물가가 뛰라는 법은 없다. 대만은 통화증가율이 26%나 되는데도 물가는 끄떡없이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돈이 많이 풀려도 그것이 구매력으로 작용하지 않는 한 물가를 자극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대만은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통화증발은 바로 인플레를 의미한다.「돈은 쓰라고 있는 것」이란 인식이 뿌리깊이 박혀 있는 데다 오랜 경험에서 돈이 많이 풀리면 인플레가 된다는 이른바 인플레 심리가 상승작용을 하는 면도 있다.
이 때문에 정부도 통화관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연간 1백억 달러가 넘을 것으로 보이는 경상수지흑자에다 1조원에 달하는 추경예산편성, 추곡수매 등으로 앞으로 풀릴 돈만 10조원에 달해 늘어나는 통화를 눌러 놓기는 용이한 일이 아닌 상황이다.
통화증발 못지 않게 위협하고 있는 것이 원자재 가격상승이다.
지난 3년간 숨을 죽이고 있던 국제원자재 시세가 올 들어 일제히 오르기 시작, 이미 20%가까이 올랐다. 더욱이 미국의 곡창지대에 한발까지 겹쳐 곡물가격 상승을 가속시키고 있다.
밀·콩·옥수수 등에서부터 목재·비철금속 등 대부분의 원자재를 수입 해다 써야 하는 우리에게는 원자재가격 상승은 바로 제품가격 상승으로 연결된다.
여기에다 근로자들의 임금인상·추곡수매가 인상 등 이 모두 물가를 부추기는 요인들이다.
물가를 부채질할 요인이 많다 해도 이에 대한 처방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감하게 시장을 개방, 벌어들이는 달러로 외국 상품을 사들이고 원 화를 절상, 수입가격을 낮추면 경상수지흑자에 따른 통화증발을 막고 국제원자재가격 상승을 상쇄시킬 수 있다.
실제로 일본은 이 같은 방법으로 국제수지관리와 물가안정이라는 2중의 효과를 올리고 있다.
엔화절상으로 고민하던 일본은 엔화절상에 따른 기업의 경쟁력감퇴를 원가절감과 내수확대로 해결하면서 엔화절상에 따른 수입상품가격 하락의 이점을 살려 지난해에도 도매물가를 3.7%나 끌어내리는데 성공했다. 물가하락으로 실질성장률(4.2%)이 경상성장률(4.1%)을 앞지르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이 그런 방법을 택해서 성과를 거두었다고 우리도 그 길을 택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가 못하다.
기업체질이 수입개방이라는 외풍을 견디어 내기에는 너무 기반이 취약한데다 내부적으로 원가절감을 통해 경쟁력을 지탱해 나갈 여건도 아니다.
봇물처럼 쏟아지는 노임인상·복지증대요구를 수용하려면 원가절감은 입에조차 담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엔화절상이 시작된 85∼87년 사이의 연평균 임금인상률이 1.2%에 그쳤던데 비해 지난해 가을과 올 상반기 두 차례에 걸친 노사분규에서 국내 임금인상률은 분규 때마다 15%선 내외의 상승률을 보이고 있다.
추곡수매가만 해도 지난해에 14%를 올려 다른 물가상승의 선도역할을 했지만 너무 많이 올렸다든가 하는 얘기를 입밖에 낼 분위기가 아니다.
경제문제가 경제논리를 떠나 각 사회집단과 정치권의 목소리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에서 이미 물가의 고삐를 쥘 수단은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해방직후의 혼란기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인플레의 무서움을 몸으로 체험했다. 그런데도 작금의 현실은 물가문제를 아예 도외시하고 있는 느낌이 짙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임금을 올리기 위해 직장마다 심한 홍역을 치렀고 지금도 치르고 있지만 물가가 오른다면 모처럼 올려 받은 임금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올해만 해도 15%정도의 임금을 올려 받았다 해도 연간 물가상승률이 10%를 넘은 것을 생각하면 올려 받은 몫의 3분의 2는 오 유가 된 셈이다.
자칫 임금인상이 원가상승요인이 되어 물가를 올리고 다시 그 보상을 받기 위해 임금을 올려야 하는 악순환에 빠질 위험만 늘어가는 상황이다.
경제문제는 분위기가 아니라 경제논리로 풀어 갈 수 있는 여건조성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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