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산에들어옛사람을보다] 치악산과 원천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3면

사자(死者)의 거처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묘지(墓地) 미학도 절정에 달하면 예술이 되는가. 후대의 기림과 섬김이 극진한 증거인가. 파동처럼 흐르는 절묘한 비탈 자락에 소탈하고 말쑥한 봉분이 얹혀 있고, 짙푸른 도래솔이 봄날의 미풍에 실려온 악상을 연주하고 있다. 묘역 가득 서기와 정기가 진동한다. 지하에 누워 영원한 숙면을 누리는 이는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1330~?). 치악산(稚岳山.1288m) 서편 아랫 자락인 원주시 행구동 석경마을에 있다.

글=박원식 월간 '사람과 산' 편집위원
사진=신준식 '사람과 산' 기자

학창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보고 외웠던 고시조 중에 이런 게 있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원천석의 회고가(懷古歌)다. 이성계의 역성 혁명으로 무너진 고려를 애도한 비가다. 원천석은 여말선초(麗末鮮初)라는 격동의 변혁기를 살았던 문인이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줏대로써 정치의 탁류를 건너뛰고, 마르지 않는 시심(詩心)으로써 생의 부조리를 관조한 인물이었다. 시대와의 야합이 아닌 절조(節操)를 구현하고, 권력의 줄타기 곡예가 아닌 독존(獨尊)의 자유를 체현한 국외자였다.

원천석의 묘비. ‘高麗國子進士元天錫之墓’라는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묘지 일원 숲 속에 봄꽃이 흐드러지고 있다. 꽃보다 참하고 그윽한 노송의 푸른 잎새에선 청명한 에테르가 번진다. 그래서 묘역에 어리는 산기(山氣)는 더욱 그윽하고 심원하다. 더욱 정중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묘역 뒤편 산기슭으론 원천석을 기리는 재실인 모운재(慕耘齋)가 있는 작은 암자 석경사(石逕寺)가 보인다. 원천석은 죽어 치악산 자락에 묻히기 이전에 생의 많은 날을 이미 치악산에 묻었다. 속된 출세나 난잡한 처세 대신 고고하고 도도한 처사적 지향을 일관한 그의 산 속 은둔은 어쩌면 이상이자 필연이었다. 시절이 수상해지자 일찌감치 산에 들어 농사를 지어 부모를 봉양하는 산림거사의 조촐한 배역을 자임했던 것이다.

하지만 원천석의 산중 삶은 생산적이고 모범적인 것이었다. 청산을 명상하고 백운을 학습해 얻은 그 지혜와 지성으로 고독을 견디고 난세를 건넜다. 산중 삶의 고난과 자족을 노래한 수많은 절창의 시를 썼으며, 애민(愛民)의 시편과 우국(憂國)의 시가를 우후죽순처럼 쏟아냈다. 원천석의 이 독특하고 비범한 은둔 행장의 집결지가 바로 치악산이다. 치악산을 주둔지로 삼아 생의 고매하고도 고독한 고공 비행을 거듭했던 것이다.

원천석은 평생 취직을 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과거에 붙어 진사(進士) 명함을 얻기는 했지만 정작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문재(文才)는 일찍이 중앙에 두루 알려졌다. 목은 이색(李穡)을 비롯한 많은 인사와 문예적 교유를 지속했다. 조선 개국의 으뜸 공신이었던 정도전(鄭道傳)과는 동갑 나이로 이미 청년 시절부터 돈독한 교제를 하며 지냈다. 정도전이 치악산의 원천석을 찾아와 읊은 시 한 수가 전해진다. 때는 공민왕 9년인 1360년. 원천석의 산중 생활 경치를 짐작케 하는 시편이다.

"동년(同年)인 원군이 원주에 숨었으니/ 다니는 길 험하고 산골도 깊어라/ 멀리서 온 친구 말을 멈추니/ 겨울바람 쓸쓸하고 날은 저물었네/ 그리던 나머지라 흔연히 웃고 나서/ 통술 앞에 다시 마음을 털어 내니/ 나는 노래 부르고 그대는 춤추네/ 이 세상의 영욕을 이미 잊었네."

여기에 기꺼이 화답한 원천석의 답시는 이런 것이었다.

"그대와 동방(同榜)한 지 몇몇 해인가/ 사귄 도리 새삼 깊다 얕다 할 것 없네/ 제각기 일에 끌려 두 곳에 있지만/ 사람 만나면 상세히 안부를 물었는데/ 오늘의 뜻밖의 걸음 하늘이 시킴인가/ 마시고 또 웃고 세세히 얘기하네/ 부디 그대는 돌아갈 길 재촉 마시라/ 우리의 이 뜻 자중하고 어렵게 여겨야 하리."

치악산에 봄 향기가 진동한다. 물오른 나무들은 연둣빛 새 잎을 틔우느라 부산하고, 발정한 숲새들은 은밀한 연가를 노래한다. 계곡 물은 수르르 솰솰 발랄하게 여울져 흐른다. 이 기찬 봄날의 향연이 무르익어 가는 치악산 서편 자락, 횡성군 강림면 부곡 계곡에 이르러 다시 원천석을 만난다. 실상 치악산은 원천석의 숨결이 가득한 산이다. 원천석은 여기 강림면의 각림사(覺林寺.현재 강림우체국 자리)에서 어린 이방원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이방원이 훗날 조선조 3대 임금 태종(太宗)에 등극, 왕위에 오르기 직전 옛날의 스승을 찾아 치악산에 친히 행차하게 된다. 고명한 은사를 관직에 앉혀 정사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도무지 조선 왕권에 이바지할 의사가 없었던 원천석은 이를 미리 알고 외면해 버린다. 치악산 정상부 산골창인 변암(弁岩)의 굴바위가 자신의 거처였지만 동네 노파에게 다른 곳에 산다고 알리도록 당부하고 은신해 버린 것. 그 바람에 노파에게 원천석의 거처를 물었던 태종은 결국 낭패를 보고 말았던 것. 이런 사화에 따라 당시 태종이 머물렀던 부곡계곡 옆 바위 벼랑을 지금까지 태종대(太宗臺)라 부르며, 임금을 속인 죄책감으로 투신 자살한 노파의 설화가 박힌 물웅덩이를 노구소(老沼)라 칭한다. 태종이 말을 타고 넘은 고개는 마치재, 수레로 지난 길은 수레너머로 불리고, 노파가 거짓으로 가리킨 바위는 횡지암(橫指岩)이라 통한다. 변암 근방에는 원천석이 거주했던 초가 누졸재(陋拙齋)가 있었다고 하니 치악산 곳곳에 그의 행적이 서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발길은 치악산 정상 비로봉에 닿는다. 기록에 따르면 원천석은 비로봉에 올라 국운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곤 했다. 원천석은 여말선초의 격변기를 살았던 여타 지식인들과 사뭇 다른 행동 양상을 보였다. 조선의 성립 자체는 천운(天運)이라 하여 긍정하는 한편 건국 주체들의 패륜과 오류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비판을 가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가 남긴 1144수의 시편 가운데 상당수 작품이 냉철한 현실 참여적 발성을 하고 있는 배경이 이와 같은 것이다. 오직 둔세(遁世)의 은일군자(隱逸君子)에 머문 게 아니라 국기와 국운의 올곧은 항진을 위해 나름의 진력을 다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원천석이 비로봉에 치악단(雉嶽壇)을 조성하고 국운 번창을 비는 제사를 주관한 행장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 여행정보

■추천 산행코스=4월 30일까지는 산불 예방에 따른 입산 통제 기간이지만 구룡사에서 비로봉에 오르는 코스는 개방돼 있다. 구룡사를 기점으로 세렴폭포와 사다리병창을 거쳐 비로봉에 오른 뒤 하산하면 6시간쯤이 소요된다.

■교통=영동고속도로 새말 나들목으로 나와 원주 방면 42번 국도를 달려 구룡 매표소에 도착한다.

*** 바로잡습니다

4월 14일자 week& 3면 '산에 들어 옛사람을 보다/치악산과 원천석' 기사 가운데 '공민왕 9년인 1630년'은 '공민왕 9년인 1360년'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