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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축소판' 영화 인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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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 한국영화 황금기를 이끌다=나운규의 '아리랑'이 개봉된 해 태어난 것을 자랑할 만큼 고인은 어려서부터 영화광이었다. 문화적 소양도 풍부했다. 함북 경성고보 1년 후배인 신동헌 감독은 "미술반을 함께하면서 시와 소설을 돌려 읽고, 특히 영어.수학을 가르쳤던 시인 김기림 선생을 좋아했다"면서 "반항아 기질이 강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다 해방을 맞아 귀국한 고인은 처음에는 미술부로 영화 현장에 뛰어든다. 최인규 감독의 연출부를 거쳐 양공주와 문학청년의 사랑을 다룬 영화 '악야'로 감독이 됐다. 이때부터 신프로덕션이라는 회사를 차려 제작을 겸했다. 이후 설립한 신필름은 종합촬영소까지 갖춘 국내 최초의 대기업형 제작사였다. 75년 문을 닫을 때까지 20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숱한 스타를 낳았다. 감독 자신도 다양한 장르의 화제작을 연출하면서 김기영.유현목 감독과 함께 한국영화의 황금기인 60년대를 주도했다.

정권과의 관계도 각별했다.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곧잘 만나고, 영화를 만들면 미리 보여줄 정도였다. 하지만 유신체제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75년 영화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에 검열을 받지 않은 장면이 들어 있다는 빌미로 신필름의 영화사 등록이 취소됐다. 실의의 나날이 시작됐다.

◆ 납북 이후=78년 1월 홍콩을 방문 중이던 최은희씨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란생활 와중에 처음 만났던 두 사람은 23년간의 결혼생활 끝에 76년 이혼한 상태였다. 신 감독이 연하의 여배우 오수미씨와의 사이에 두 자녀를 둔 것이 원인이었다. 실종사건의 배후로 의심받기도 했던 신 감독 역시 같은 해 가을 홍콩에서 사라졌다.

이 희대의 실종극은 한동안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이들이 평양에 있다는 사실은 6년 뒤에야 공식 확인됐다. 84년 안기부는 두 사람이 북한의 공작원에 의해 강제로 납치됐다고 밝혔다.

영화광인 김정일의 전폭적 지원으로 신 감독은 83년 신필름의 간판을 내걸고 영화 활동을 재개했다. 김정일은 '연간 30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 '국내상영은 안 해도 좋으니 대담하게 찍으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탈북 직전까지 2년여의 짧은 기간에 '돌아오지 않는 밀사' '사랑 사랑 내 사랑' 등 7편을 만들었다. 이 중 최은희씨가 주연한 '소금'은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86년 베를린 영화제 참석을 위해 유럽을 방문한 부부는 오스트리아 빈의 미국대사관을 통해 극적인 탈북에 성공했다. 나중에 신 감독은 북한 체류 시절이 "사회성을 갖고 영화를 보는 눈을 길러 주었다"면서도 "북한 영화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돌이켰다.

◆ 탈북 이후=부부는 신변의 위협 등을 이유로 한동안 미국에 머물렀다. 할리우드를 무대로 독립영화사를 차려 가족영화 '세 명의 닌자' 시리즈를 제작했다. 국내에서도 KAL기 폭파사건을 다룬 '마유미'와 김형욱 실종사건을 다룬 '증발' 등 민감한 소재를 스크린에 옮기는 저력을 보여줬다. 칠순을 넘어도 식을 줄 모르는 창작열을 그는 "한창때 북한에 끌려가 8년을 허비했다"는 말로 표현하곤 했다.

북한에서의 행적에 대해 검찰은 불기소 처분을 내렸지만 그의 영화가 모두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마련한 회고전에서는 북한 시절 만든 '탈출기'의 일반상영이 금지됐다. 2000년 본격적으로 국내로 무대를 옮긴 부부는 뮤지컬.영화 제작뿐 아니라 안양에 신필름영화아카데미를 설립하는 등 후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급변하는 한국영화시장에서 그가 설 자리는 그리 넓지 않았다. 저예산 영화 '겨울 이야기'(17일 오전 12시55분 SBS 방송 예정)는 극장 개봉을 하지 못한 채 유작이 됐다. 2004년 사위로부터 간 이식 수술을 받은 뒤에도 그는 90년대 중반부터 품어 온 대작 '칭기즈칸'의 제작 준비에 골몰했다. 생전에 "영원한 현역"이라고 자처한 그대로의 삶이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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