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자기고백' 왜 했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한나라당이 김덕룡.박성범 의원을 검찰에 수사의뢰키로 한 건 일종의 극약처방이다. 5.31 지방선거 공천 잡음이 더 이상 방치하기 어려운 상황까지 차올랐기 때문이다. 당 안팎에선 그동안 "공천 잡음이 언젠가 폭발할 것"이라는 말들이 떠돌았다. 비리 혐의를 포착한 검찰과 경찰이 이미 수사에 나섰다는 얘기도 적지 않았다.

상황이 악화되는데도 당에선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박근혜 대표 등 지도부는 "공천 비리를 엄단하겠다"고 공언하며 클린공천감찰단을 발족했지만 여당의 공세 등을 우려해 제대로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마침내 중진급 의원들이 연루된 의혹까지 불거지자 외부에서 공격당하기 전에 스스로 문제를 터뜨리는 '차악책(次惡策)'을 선택한 것 같다. 한 당직자는 "박 대표가 보고를 받고 '내 식구의 살을 에는 맘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국민과 약속한 만큼 엄정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다'는 심경을 피력했다"고 말했다. 당 지도부의 한 인사는 "감찰단에 진정한 사람들이 기자회견을 해 폭로하겠다고 압박하자 전격적으로 공개한 것으로 안다"고도 귀띔했다. 공천 잡음이 이 지경까지 이른 데 대해 당 관계자들은 분권형 공천 실험이 자리를 잡지 못한 데서 원인을 찾는다.

한나라당은 이번 선거에서 기초단체장과 광역.기초 의원 공천권을 16개 시.도당 공천심사위에 위임했다. 하지만 시스템이 엉성했다. 당 관계자는 "중앙당 심사위를 포함해 공천심사위원 수만 190명이 넘는다"며 "공천 대상자들은 둘째고, 심사위원을 검증하기에도 벅찬 실정"이라고 했다. 그만큼 비리가 스며들 여지도 컸다.

모호한 심사 기준도 부정을 불렀다. 기초단체장 평가 기준에는 참신성.미래지향성.대선잠재력 등 주관적 항목이 많다. 자연히 지역구 의원이나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옛 지구당 위원장)의 입김이 세졌다. 부산시당 공천심사위원인 김희정 의원은 "자질이 부족한 사람도 지역구 의원이 밀어붙이면 막기가 힘든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한 공천심사위원은 "심사위원들이 대개 지역구 의원이나 운영위원장이다 보니 서로 담합해 공천을 주고받는 일종의 '품앗이 공천'이 횡행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더욱이 7월 당 대표와 최고위원을 뽑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중진들이 '자기 사람 심기'에 나섰다는 얘기까지 돌면서 공천은 더 혼탁해지고 있다. 한 공천심사위원은 "곳곳에서 모 의원이 공천에 관여한다는 얘기가 파다하다"며 "심지어 비협조적인 운영위원장이 협박 전화를 받은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강주안.남궁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