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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는 지금 ③ 실체 없는 '좌파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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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으로 내세운 칠레의 바첼렛 대통령이 취임 한 달을 맞은 11일 브라질을 찾아 룰라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내세운 정치 이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만들기에 최선을 다한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브라질리아 AFP=연합뉴스]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정권은 좌파 정권이 맞나?

"아니다."

-그럼 뭔가?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정치적으로는 포퓰리즘 정권이다."

-그렇다면 남미에서 좌파 정권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는 어디인가?

"없다."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가장 궁금했던 점은 남미에 불고 있다는'좌파 바람'의 실체였다. 그러나 남미에서 만난 유력 정치인.기업인.학자.언론인은 한결같이 좌파 바람이란 표현에 고개를 저었다. 브라질의 저명한 경제인이자 정치인인 멘돈사 지 바로스(전 통신장관) 박사는 "빈곤층에 대한 퍼주기 식 포퓰리즘, 말뿐인 반미(反美)주의, 일각의 자원민족주의가 좌파 정권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을 뿐 진정한 의미의 좌파 정권은 남미에 없다"고 주장했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 속한 노동자당(PT)은 분배와 형평을 강조하는 좌파 정당이 맞다. 하지만 집권 후 룰라는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했다.

지난달 11일 취임한 미첼 바첼렛 칠레 대통령은 집권 100일 안에 실천할 36가지 공약을 발표했다. 일자리 창출이 최우선이다. 직업훈련에 참가하는 청년층에 대한 정부 지원 확대, 대학생에 대한 파트타임 근로 허용 등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대하는 조치가 대부분이다.

칠레에서 자동차 수입업체를 경영하고 있는 마우리시오 부드니크 사장은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좌우를 가르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정당 차원에서는 편의상 좌우 구별이 있을 수 있지만 집권하면 좌가 우로 가고, 우가 좌로 가면서 조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계화 시대의 정치 현실이라는 것이다.

'워싱턴 컨센서스'가 강요한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에 대한 반발이 남미에서 좌파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단선적 해석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깨달은 것은 이번 취재의 성과였다. 그보다는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실용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지금 남미에 불고 있는 좌파 바람은 실체가 없는 헛바람일 뿐이다.

산티아고=배명복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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