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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탁씨의 '이기적' 유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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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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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검색창에서 '교통사고'를 치면 '합의금'이나 '사망''후유증'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가 자동연관검색어로 따라붙는다. 아무리 가벼운 접촉사고라도 시간 낭비에 감정 소모까지 만만치 않다 보니 교통사고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지난 주말 제2서해안고속도로 하행선을 타던 많은 운전자도 그랬다. 코란도 한 대가 중앙분리대를 긁으면서 계속 직진하는 걸 보고는 행여 내 차와 부딪칠까 싶어 얼른 2차로로 피해 빠져나가기 바빴다.

한영탁씨가 의식을 잃은 운전자의 차량을 자신의 승용차로 가로 막아 세운 뒤 차에서 내려 운전석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SUV차량 영상화면 캡처]

한영탁씨가 의식을 잃은 운전자의 차량을 자신의 승용차로 가로 막아 세운 뒤 차에서 내려 운전석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SUV차량 영상화면 캡처]

 그런데 한영탁(46)씨는 달랐다. 오히려 자신의 투스카니 차로 가로막아 '고의 교통사고'를 냈다. 영탁씨의 의로운 행동 덕분에 의식을 잃었던 코란도 운전자는 목숨을 구했고, 자칫 대형 인명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던 다중 추돌사고는 아예 벌어지지 않았다. 오로지 영탁씨만 차 범퍼와 경고등이 깨지는 손실을 본 채 목적지인 평택에 예상보다 늦게 도착했을 뿐이다. 영탁씨는 선행이 알려진 뒤 "차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고, 다음 날 코란도 운전자로부터 고맙다는 감사 전화를 받았으니 그걸로 됐다"고 말해 세상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이쯤 되면 무슨 숨어 있던 영웅의 재림이라도 목격한 게 아닐까 싶지만 영탁씨는 크레인 기사로 일하는 평범한 시민일 뿐이다. 손해를 무릅쓰고 남을 돕는 보통 사람은 전에도 드물지 않았다. 2016년 한밤중 불이 난 원룸 건물에 다시 뛰어들어가 일일이 초인종을 눌러 대피시키다 숨진 '초인종 의인' 고(故) 안치범씨도 평범한 성우 지망생이었다.

성우 지망생이었던 안치범씨는 한밤중 불이 난 원룸 건물에 뛰어들어가 초인종을 누르며 자고 있던 사람들을 대피시키다 목숨을 잃었다. [CCTV 영상]

성우 지망생이었던 안치범씨는 한밤중 불이 난 원룸 건물에 뛰어들어가 초인종을 누르며 자고 있던 사람들을 대피시키다 목숨을 잃었다. [CCTV 영상]

 대가는커녕 때론 이렇게 목숨까지 던지며 남을 돕는 평범한 인물의 영웅적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에드워드 윌슨 같은 1970년대의 사회생물학자들은 이타적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 실은 개체를 넘어 유전자를 보전하려는 이기적인 행위라고 봤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을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유전자를 위한 로봇'으로 정의하기까지 했다.
 고귀한 희생이 정말 유전자의 명령일 뿐일까. 여러 과학적 상식을 유쾌하게 뒤집는 UC 리버사이드 이상희 교수는 『인류의 기원』에서 전혀 다른 얘기를 한다. 이타성이야말로 개미나 벌·원숭이와 달리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며, 그 원동력을 수퍼 히어로 같은 강함이 아니라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약함에서 찾는다. 워낙 약한 존재이다 보니 살아남기 위해 협력과 정보력이 필요했고, 정보는 가졌지만 스스로 생존이 어려운 노인을 돌보는 과정에서 보편적인 협력과 이타심이 생겨났다는 주장이다. 약한 존재인 만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게 필요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무슨 가설을 좇든 혐오와 배제가 판치는 이 시기에 인간은 약하기에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걸 몸소 보여준 영탁씨의 이기적이며 이타적인 유전자가 고마울 따름이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