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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대처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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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철두철미(thoroughness), 강도 높은 업무, 창의성, 불굴의 의지(tenacity). 한국 정부와 현대자동차그룹에 선전포고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자사 홈페이지에 공개한 기업문화다. 먹잇감을 한번 물면 여간해선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벌처펀드의 은근한 협박 같다. 벌처(vulture)는 썩은 고기만 먹는 대머리독수리다. 하버드 법대 출신의 폴 싱어(74)가 1977년 자신의 중간 이름을 따서 설립한 엘리엇은 현재 340억 달러(36조2600억원)가 넘는 자산을 굴린다.

엘리엇은 국채 투자로 재미를 봤다. 1996년 페루 국채를 1140만 달러에 사들여 5600만 달러를 받아냈다. 돈을 받아내기 위해 인권 유린과 부패 혐의로 국외 도피를 시도한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의 제트비행기를 압류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콩고 국채에 투자해 콩고 정부가 받은 국제사회의 빈곤 지원금을 악착같이 받아낸 적도 있다. 15년의 공방 끝에 승리한 아르헨티나 국채 투자는 벌처펀드 엘리엇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줬다. 2001년 부도 위기에 처한 아르헨티나 국채에 1억 달러 남짓을 투자해 2016년 24억 달러를 받아냈다. 미국 법원 제소와 아르헨티나 선박 압류 등의 전방위 압박이 먹혔다.

엘리엇의 공격을 받은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은 지난주 외신 인터뷰에서 “엘리엇에 흔들리지 않겠다”며 정면 대응을 선언했다. 단기 이익을 추구하는 엘리엇이 중장기적으로 주주가치를 훼손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전략이다. 싱어는 지난해 언론 기고에서 “나쁜 실적을 회피하기 위해 ‘장기 이익’이라는 방패에 숨어버리는 경영자가 많다”며 “단기와 장기 이익은 충돌하지 않으며 좋은 아이디어와 나쁜 아이디어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지난해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경영자를 위한 행동주의 펀드 방어법’에서 이런 해법을 내놨다. 첫째, 적(敵)에 대해 공부하라. 그들은 종종 자만심이 강하고 성급하다. 이런저런 포장을 걷어내면 결국 자사주 매입이라는 진부한 요구가 많다. 둘째, 공격에 대비하라. 다른 주주와의 관계를 미리 다져 놓아야 한다. 셋째, 숨 막힐 정도로 성실하게 적을 대하라.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는 칼 아이컨 같은 성마른 투자자와의 저녁식사도 참아냈다. 넷째, 필요하면 적의 요구를 받아들이되, 이사회 참여만은 결코 허용하지 말아라. 싸우다가 볼 장 다 본다. 일종의 엘리엇 대처법인 셈인데 중요한 게 하나 빠졌다. 건강한 경영으로 벌처가 좋아하는 썩은 고기로 변질되지 않는 것이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