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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상자에서 골프백, 전자담배 파우치까지...'돈주머니' 변천사

중앙일보

입력

'드루킹' 김동원(49)씨 일당이 김경수 경남지사 후보의 전직 보좌관 한모(49)씨에게 500만원을 건넬 때 이용한 건 전자담배 '아이코스'의 파우치였다. 지난해 9월25일 작은 손가방에 전자담배 기계와 500만원이 든 흰봉투를 넣어 함께 건넸다고 한다.

시대와 법이 바뀌며 '돈주머니'도 변했다. 청탁성 자금 전달에 전자담배 파우치가 등장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1993년 금융실명제가 시행되기 전엔 수표나 가명·차명계좌가 주로 이용됐다. 당시에도 수표나 계좌를 이용해 돈을 전달할 경우 거래한 흔적은 남았다. 하지만 가명이나 차명을 쓴 탓에 사실상 추적이 어렵다는을 악용해 보내기 간편한 수표나 계좌를 활용했다.

금융실명제 시행 이후 계좌나 수표를 쓰는 게 발각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검은돈의 대세는 현금으로 옮아갔다. 현금 운송 수단으로 가장 먼저 주목 받은 건 사과상자다. 지난 1997년 수서비리 사건 당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 사과상자를 애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정 전 회장은 사과상자(2억4000만원)와 라면상자(1억2000만원)을 이용해 약 100억여원의 검은돈을 살포했다. 정 전 회장은 상자를 전달할 때 “아주 특별한 사과니까 잘 드십시오” 돈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했다.

사과상자는 비자금 저장용도로도 유용하게 쓰였다. 1996년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당시 쌍용양회 경리 창고에서 사과상자 25개(61억원)가 발견된 적도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쌍용양회 경리부창고에 숨겨뒀다가 들킨 사과박스 25상자에 담은 현찰 61억원. [중앙포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쌍용양회 경리부창고에 숨겨뒀다가 들킨 사과박스 25상자에 담은 현찰 61억원. [중앙포토]

1997년 외환위기의 서막을 연 한보사태 이후 사과상자가 뇌물용기로 대중에 깊이 각인된 뒤에는 돈주머니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골프가방이나 서류가방, 간고등어·굴비·곶감 상자 등 온갖 운반도구가 유명세를 탔다.

그 중 품위있는 수단으로 애용된 게 골프가방(1억~3억원)이다. 골프가방은 지난 2000년 '진승현 게이트' 때 크게 주목 받았다. 특급호텔 주차장에서 승용차 트렁크에 골프가방을 옮겨싣는 고급스러운 수법이 주로 쓰였다. 007 서류가방(1억원), 케이크상자(5000만원 미만) 등도 당시 주목 받은 돈 전달 수법이었다.

감시의 눈길이 점점 심해지면서 역설적으로 더 과감한 방법이 고안된 적도 있다. 지난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한나라당은 서울 만남의광장 휴게소에서 현금 150억원을 가득 채운 2.5톤 트럭을 통째 넘겨받았다.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뇌물 전달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얘기가 나왔다. ‘차떼기’라는 말이 전국에 유행하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난 2009년 5만원권 새 지폐가 나온 뒤 돈주머니는 또 다시 변화의 계기를 맞는다. 같은 액수의 돈을 보내도 부피를 5분의 1 이하로 줄일 수 있어서다. 지난 2015년에는 고(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측이 '비타500' 상자에 현금을 담아 이완구 전 국무총리에게 돈을 건넸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가 나와 이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적도 있다.

다만 이후 비타500 상자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 났고, 커피믹스 상자 크기와 비슷한 용기라는 진술이 나왔다. 이 사건에서 이 전 총리는 성 전 회장이 생전 남긴 육성을 증거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법원 판단에 따라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오원석 기자 oh.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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