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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이렇게라도 살아만 있어 주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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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김순희씨는 손가락으로 남편 이철수씨 손바닥에 의사를 표시한다. 최정동 기자

아내는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힘들게 움직여 남편의 손바닥에 무언가 끼적인다. "미음? 이응? 미음이 맞으면 눈을 깜빡여 봐." 남편이 열심히 묻는다. 아내의 눈꺼풀이 살짝 움직인다. 아내가 이번에는 모음을 쓴다. "아, 몇 시냐고? 10시40분." 아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는 남편, "물""소변"같은 일상의 대화 외에 평소 안 쓰는 내용을 전하려면 한 문장에 족히 30분은 걸린다.

김순희(60.여)씨가 허리와 다리의 통증을 호소한 건 1997년. 1년간 여기저기 병원을 다닌 끝에 남편 이철수(60.전 중구 의회 사무국장)씨는 믿기지 않는 선고를 받았다. 아내의 병이 다발성 전신위축증(MSA)이라고 했다. 소뇌세포가 점점 파괴되면서 몸의 운동기능을 잃어간다는 병이다. 원인이나 치료법은 아직 모른다. 그저 매월 병원에 가 증상을 완화하는 약을 받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걷지 못하고 말도 어눌해졌다. 필담을 나누던 것도 이제는 안 된다. 눈꺼풀과 오른쪽 집게손가락만 겨우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투병하면서 이씨의 사교생활도 없어졌다. 시집간 딸(35)이 같이 살며 낮시간 아내를 돌봤고, 밤에는 퇴근한 이씨가 교대한다.

처음에 남편은 "아내를 원상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이제는 "지금 이렇게만이라도 살아 있게 해 달라"고 빈다. 투병 10년간 이씨는 아내를 치료하기 위해 양.한방, 대체의학, 기치료까지 30여 가지의 각종 치료법을 써봤다. 검사.입원.수술.퇴원도 반복했다. 이씨는 치료 비용을 "억대"라고만 했다. 그는 최근 아내의 간병기를 책으로 냈다. 제목은 '당신이 살아있으므로 행복합니다'(책이있는마을)다. 책을 쓴 이유는 "희귀병으로 고생하는 다른 환자 가족들과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고 싶어서"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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