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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의 위장술? 만찬 명단 속 '당중앙위 실장'의 정체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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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지 한 달여 뒤인 2000년 7월 27일 북한은 서울에서 열리는 제1차 남북장관급회담을 앞두고 대표단 명단을 판문점 연락 채널을 통해 보내왔다. 수석대표(북측은 단장)에 전금진, 보장성원 권호웅 등이었다.

지난달 27일 판문점 평화의집 3층에서 정상회담 공식 만찬중 참석자들이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판문점=-공동취재단]

지난달 27일 판문점 평화의집 3층에서 정상회담 공식 만찬중 참석자들이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판문점=-공동취재단]

이를 두고 정부는 잠깐 혼선을 일으켰다. 북측이 보내온 사진은 당국이 각각 전금철, 권민으로 알고 있었던 사람들인데 기재된 이름이 달랐기 때문이다. 정부의 확인 결과 전금철과 권민은 각각 전금진, 권호웅의 가명이었다. 정부 당국자는 "2000년 이전에 북한은 남북 접촉에서 대부분 가명을 사용했다"며 "2000년 이후에 이런 경우가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임춘길로 활동했던 임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이나 안경호(가명 안병수) 통전부 부부장 등도 마찬가지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관여했던 전직 고위당국자는 "정상회담 도중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백화원 벽에 걸린 그림을 설명하며 전금진 참사가 그렸다고 했는데 남측에는 전금철로 알려졌던 인물"이라며 "이후 김정일 위원장이 가명을 쓰지 말도록 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전금철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존명을 사용한 전금진 장관급회담 북측 수석대표. [중앙포토]

전금철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존명을 사용한 전금진 장관급회담 북측 수석대표. [중앙포토]

권민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던 권호웅 내각참사 [중앙포토]

권민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던 권호웅 내각참사 [중앙포토]

지난달 27일 판문점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 공식 만찬장에서 비슷한 분위기가 재연됐다. 이번엔 이름이 아니라 직책을 두고서다. 북한은 회담 전 남북 접촉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만찬 참석 대상자 24명(공연 관계자 제외)의 명단을 한국에 건넸다. 여기엔 이름과 직책이 적혀 있었는데, "당중앙위원회 부장"이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소속은 빠져 있었다. 명단 중 한광상은 제1부부장을 지낸 이력을 바탕으로 재정경리부장인 것으로 당국은 추정했다. 이택건, 맹경일(이상 통전부), 조용원(조직지도부) 등 비교적 남측에 알려진 인물들의 소속도 쉽게 파악됐다. 지난 1월 예술단 파견 실무회담에 문화성 국장 직함으로 나왔던 권혁봉은 이번에 중앙위(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김성혜ㆍ이현ㆍ이명철 등 "당중앙위 실장"이라고만 적혀 있는 인사들은 정확한 소속 부서를 알 수 없었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 노동당에는 서기실이나 39호실 등 ‘실’을 붙이는 부처가 몇 안 된다"며 "이들은 통전부 소속으로 알고 있는데 통전부 내에 조직이 바뀌었거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실장이라는 대외 직함을 당과 조합해 통보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특히 국무위원회 소속 인물들은 만찬 내내 눈길을 끌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비서실장(서기실장)인 김창선은 국무위 부장으로, 재정경리부 부부장인 마원춘은 국무위 국장으로 명찰에 표기했다. 정창현 현대사 연구소장은 "김 위원장이 국무위원장 자격으로 대외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무위원회를 부각하려는 차원일 수 있다"며 "남측에 거부감이 있는 노동당 인물의 숫자를 줄이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국무위 국장으로 돼 있던 강수는 이번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통일부는 북한에 강수라는 동명이인이 여럿인데, 이번에 참석한 인물은 지난해 소장(별 하나)이 된 군부 인사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측 참석자들이 여러차례 그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지만 그는 "국무위원회에서 일합니다"는 대답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럼 국무위원장을 옆에서 보좌하냐"는 질문에도 "우리 인민들은 모두 국무위원장을 보좌한다"며 얼버무렸다.

당국은 북측이 통보해 온 내용을 공식 직함으로 보면서도 북한이 국무위원회나 당 조직을 정비한 것인지, 구체적인 직함을 밝히기 꺼린 것인지를 분석 중이다. 이전에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했듯이, 직함을 위장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전직 정보 당국자는 "북한은 조직의 구성을 비밀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또 김성혜 등 당 과장급 인사들이 정상급 행사, 소위 1호 행사인 대통령 행사에 참석하게 되면서 ‘과장’ 직함으론 격이 안맞는다는 판단에 따라 임시로 ‘실장’ 타이틀을 달아줬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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