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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객이 6번 주먹질, 폭언" 19년 헌신한 女구급대원의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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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폭행치사죄 검토  

지난달 2일 전북 익산소방서 인화119안전센터 소속 119구급차 내부 CCTV 영상 캡처. 이날 익산역 앞 도로에서 술 취해 쓰러진 윤모(48)씨가 그를 구조한 구급대원 박모(33·소방사)씨를 손바닥으로 때리고 있다. [사진 전북소방본부]

지난달 2일 전북 익산소방서 인화119안전센터 소속 119구급차 내부 CCTV 영상 캡처. 이날 익산역 앞 도로에서 술 취해 쓰러진 윤모(48)씨가 그를 구조한 구급대원 박모(33·소방사)씨를 손바닥으로 때리고 있다. [사진 전북소방본부]

"강 주임은 고질적으로 허리가 아픈 것 외에 심장이나 혈관 질환 없이 아주 건강했어요."

두 아들 둔 '부부 소방관' 강모 소방위 #도로에 쓰러진 40대 구조하다 봉변 #머리 맞고 폭언 들은 뒤 건강 적신호 #병원 "폭행·스트레스로 자율신경 손상" #딸꾹질·불면증 호소 한 달 만에 숨져

정은애 전북 익산소방서 인화119안전센터장(소방경)은 부하 직원인 강모(51·여·소방위)씨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정 센터장은 1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워낙 성격이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직원이라 아파도 '금방 일어나겠지' 했는데 이렇게 영영 깨어나지 못할 줄은 몰랐다"며 안타까워했다.

구급대원인 강씨는 이날 오전 5시9분쯤 전북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뒀다. 술에 취해 도로에 쓰러져 있던 40대 남성을 구조하다 그가 휘두른 주먹에 머리를 맞고 폭언을 들은 지 한 달 만이다.

전북소방본부에 따르면 강씨는 지난달 2일 오후 1시2분쯤 익산시 중앙동 익산역 앞 도로 한복판에서 술에 취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윤모(48)씨를 119구급차에 태워 원광대병원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정신이 든 윤씨는 응급실 앞에서 강씨의 머리를 주먹으로 6대 때리고 "○○년, XX를 쫙 찢어버린다" 등 폭언을 퍼부었다.

지난달 2일 전북 익산소방서 인화119안전센터 소속 119구급차 내부 CCTV 영상 캡처. 이날 익산역 앞 도로에서 술 취해 쓰러진 윤모(48)씨가 그를 구조한 구급대원 박모(33·소방사)씨를 손바닥으로 때리고 있다. 뒤쪽에서 구급대원 강모(51·여·소방위)가 이를 말리고 있다. [사진 전북소방본부]

지난달 2일 전북 익산소방서 인화119안전센터 소속 119구급차 내부 CCTV 영상 캡처. 이날 익산역 앞 도로에서 술 취해 쓰러진 윤모(48)씨가 그를 구조한 구급대원 박모(33·소방사)씨를 손바닥으로 때리고 있다. 뒤쪽에서 구급대원 강모(51·여·소방위)가 이를 말리고 있다. [사진 전북소방본부]

윤씨는 앞서 구급차 안에서 구급대원 박모(33·소방사)씨의 얼굴도 손바닥으로 때렸다.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된 윤씨는 무직에, 폭력 혐의로 교도소에 다녀온 것으로 조사됐다.

강씨는 폭행을 당한 이후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강씨는 정 센터장에게 "맞은 것보다 여성으로서 모욕적인 욕을 들은 게 가장 끔찍하다"고 하소연했다. 급기야 같은 달 5일 강씨는 길을 걷다 머리가 어지러워 구토를 하고 쓰러졌다. 병원에서는 "폭행과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자율신경이 손상됐다"고 진단했다.

강씨는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진경제(경련을 가라앉히는 약)를 복용하고 밤에는 숟가락을 물고 잤다. 병세가 나빠지자 그는 이달 초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기로 예약했다. 하지만 지난달 24일 전주 자택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뒤 병원에 옮겨졌지만, 일주일 만에 숨졌다.

전북소방본부에 따르면 강씨는 지난 1999년 11월 29일 소방사로 첫발을 뗀 뒤 18년5개월간 전주와 장수·익산 등을 돌아다니며 소방관으로서 헌신했다. 동갑내기 남편 최모(51·소방위)씨도 소방관이다. 강씨와 비슷한 시기에 소방관에 입문해 현재 김제소방서 화재진압대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소방관 부부'인 두 사람 슬하에는 각각 초등학교 6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두 아들(11·16세)이 있다.

강씨는 지난 1월부터 인화센터에서 일해 왔다. 인화센터에는 총 3개의 구급팀이 있고, 1팀당 3명씩 3교대로 운영되고 있다. 쉰을 넘긴 강씨는 구급대원 9명 중 나이가 제일 많지만, 숨지기 직전까지 20~30대 대원들과 똑같이 현장을 누볐다.

정 센터장은 "소방관은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소방위까지는 구급대원이든 화재진압대원이든 정년인 60세까지 현장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강씨는 사무실 책상에 가족 사진 한 장 붙이지 못했다고 한다. 구급대원 3명이 책상과 컴퓨터·서랍장 하나를 같이 쓰고 있어서다.

강씨처럼 구급대원은 구조 과정에서 봉변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전북소방본부에 따르면 전북 지역에서 일어난 구급대원 폭행 사건은 최근 2년(2016~2017년) 사이 14건에 달한다. 같은 기간 전국에서는 366건이 일어났다. 강씨가 근무한 인화센터도 몇 달 전 구급대원 2명이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해자들 대부분은 재판에 넘겨져도 벌금이나 집행유예 등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는 지적이 많다.

정 센터장은 "그동안 소방관들은 맞아도 일이 커질까 봐 신고를 안 하는 분위기였다. 예전에는 '제복 입은 사람들은 맞는 게 일'이라고 할 정도였다. 최근에는 폭력 수위가 심해져 가해자들에 대한 사법 조치는 이뤄지고 있지만, 피해자(소방관)들에 대한 예방 및 사후 조치는 미흡한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수사기관도 구급대원을 상대로 한 폭력에 대해서는 '무관용 원칙'을 적용해 엄벌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전주지검 군산지청은 지난달 19일 구급(소방) 활동을 방해한 혐의(소방기본법 위반)로 윤씨를 불구속 기소했다. 소방기본법에 따르면 구급대원을 폭행·협박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게 돼 있다. 검찰은 피해자가 숨진 만큼 공소장 변경을 검토하고 있다. 전승수 군산지청장은 "피해자의 사인이 (윤씨의) 폭행 때문인지 검토해 인과 관계가 인정되면 폭행치사죄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강씨의 빈소는 전주 대송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전북소방본부는 "직무를 다하다 목숨을 잃은 강씨에 대해 순직 처리하고, 소방경으로 1계급 특진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영결식은 오는 3일 오전 10시 익산소방서 차고에서 익산소방서장장(葬)으로 엄수할 예정이다.

익산=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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